미슐랭 가이드의 맛
김박은경
파리에 밴 년도 더 된 빵집이 있다 반죽할 때마다 일부를 남겨 다음에 섞는다 했지 종가의 간장도 그렇다 했지 감글 때마다 백 년도 더 된 씨간장을 섞는다 했지 뱀차즈기라 했지 겁없이 얼음 바람 삼켜 쓰디쓴 맛, 때가 되면 입 벌린 뱀처럼 노란 꽃 피운다 했지
아이가 들어설 때마다 숨 떼어 넣는 일이겠지 그럴 때마다 백년 천년 만년 전 기억들 조금씩 섞이고 부풀어 새살 짓는 일이겠지 낮게 엎드린 통증을 딛고 말랑한 머리 밀어올리는 일이겠지 더 환하고 더 반짝이는 아이들의 아이들까지
얼어붙은 땅 위로 시들어가는 몸 위로 빵집과 장독대와 뱀차즈기 같은 것들 자리를 지키는 일이겠지 제 맛 끌어올리는 일이겠지 전신을 바닥에 바싹 붙이고 절대 아무데도 가지 않으며 조금씩 감쪽같이 남겨두며 대를 이어 자꾸자꾸 흘리는 일이겠지
쓰디쓴 맛에 침이 고여 마른 입맛이 돌아오듯 짠맛이 오래 묵어 달게 변하듯 변함없이 겉과 속이 일품인 허기, 눈이 시리고 무릎이 텅 비는 날이 온다 해도 오래전 그 맛이 은근히도 밀로 올라오니 눈뜰 때마다 붉은 해들이 무진한 미뢰처럼 솟아오르는 일이겠지
-전문-
해설> 한 문장: 파리의 백 년도 더 된 빵집에서 반죽의 일부를 남겨두고 다음 빵을 굽듯, 종갓집에서 씨간장을 섞어 다음의 밥상을 차리듯, 사라진 앞 시간이 "쓰디쓴 맛"을 지닌 "통증"과 같다 할지라도 그를 품고 생을 이어붙일 때 "무진한 미뢰"처럼 매일의 "해"가 솟아날 수 있음을 전하는 시다. 시인에겐 과거의 고통을 잊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해결책을 찾아나서는 행위보다 우리에게 남겨진 고통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알고자 하는 행위가 중요하다. 이는 시인이 우리의 삶을 미화해서 만든 상상 속에 사는 일보다 풍경의 흉측함을 견딤으로써 얻는 진실로 살아가는 일이 더 귀하다고 여겨서겠다. 시몬 베유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김박은경은 상상한 것과 실제의 모습 사이의 불균형을 견디면서 '이 풍경은 흉측하다'가 아니라 '나는 견딘다'라고 말하는 시인에 해당한다. (p. 시 60/ 론 114) (양경언/ 문학평론가)
* "상상한 것과 실제의 모습 사이의 불균형을 견딜 것. '나는 견딘다'가 '이 풍경은 흉측하다'보다 낫다." 시몬 베유(루트 클뤼거, 『삶은 계속된다』, 최성민 옮김, 문학동네, 2018, 제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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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못 속에는 못 속이는 이야기』에서/ 2020. 10. 15. <문학동네> 펴냄
* 김박은경/ 2002년『시와반시』로 등단, 시집 『온통 빨강이라니』, 『중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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