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살이
조영심
그깟 모본단 한 감에
팔자가 뒤바뀌는 세상도 있었나니
하, 방죽안댁 큰아들
징용장 바꿔치기한 구장 덕택에 현해탄을 건넜으나
끝내 돌아오지 못했는데,
낮은 토방엔 개맨드라미만 붉디붉게 피고 질 뿐
열 살배기 막내,
홀어미 그늘에서 숨 쉬는 것도 부끄러워
밥 수저 드는 것도 죄만 같아
두 발 부르트도록 가파른 강둑이며 논두렁밭두렁
죄다 훑고 다녔는데
안 터 부잣짐 꼴머슴 풋내 나는 낫질에 허기진 꼴망태,
그 꼴이 그 꼴이었는데
허, 아비 없는 울타리는 주인 없는 대문
시도 때도 없는 공출이며 수탈이여
도적들 먹거리 곳간, 진귀한 고방이 따로 있다더냐
살아생전 머슴살이 면해볼 날 오긴 온다더냐
푸른 설움 악물고 황소처럼 일만 해도,
예나 지금이나
타고난 팔자
현고학생부군신위 여덟 자는 바뀔 줄 몰라
담살이 후에 다시 찾은 그 울타리 설운 자리에
새 꽃은 피고 지고 또 피고 지고
드난살이 마치고 머리 얹어도 또 담살이 담살이
모본단 한 감이 아직도 통하는 세상
언제 이 담들 허물어질까
곳곳마다 거대한 담
-전문-
해설> 한 문장: 우연이 없는 인과의 세계는 인간의 삶이며 역사의 원리이기도 하다. 화자는 모본단 비단 한 감에 팔자가 바뀌었다고 하지만 인과율의 법칙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우리의 삶과 역사를 지배한다. 일제의 강제 징용과 공출, 수탈로 인해 "살아생전 머슴살이"를 벗어나지 못하는 "타고난 팔자"는, 이러한 원리의 냉엄함을 깨닫게 해준다. 현해탄 건너로 징용 끌려갔다가 결국 조국에 돌아오지 못한 채 생을 마친 방죽안댁 큰 아들에게서 열 살배기 막내는, 평생을 살아도 씻기지 않는 부끄럽고 죄 짓는 운명을 넘겨받았다. 바로 "푸른 설움 악물고 황소처럼 일만" 하면서 평생을 머슴 아닌 머슴의 삶을 사는 담살이의 삶이다. 형이 아니라 역사가 그에게 떠넘긴 운명이다./ 화자는 열 살배기 막내의 삶을 통해 당시의 보편적 상황과 개인의 특별한 삶의 이력을 고스란히 담보해 낸다. 과거의 상처를 들여다보고 다시금 세월 깊숙이 묻어주는 회고의 방식은, 새로운 삶과의 경이로운 만남이라는 진실한 체험을 방해한다. 대상과의 분리에서 비롯된 상처를 무의미하게 방치한 것과 다르지 않다. 냉엄한 삼자로서의 화자가 상처의 주체나 대상을 다시 불러내어 아픔을 다시 체험하게 하는 것은, 지난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 시적 대상에 대한 자기 방식의 위로와 위안이며, 나아가 대상과 세상과의 진실한 관계 회복에 대한 간절한 바람이다. 하지만 '막내'는 타고난 팔자, 인과율의 현고학생부군신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새 꽃은 피고 지고 또 피고 지"면서 스스로의 삶을 갱신하는데, '열 살배기 막내'는 "살아생전 머슴살이"를 면하지 못하고 담살이로 삶을 마감한다. '허기진 꼴망태'처럼 삶의 상처를 회상하는 일은 상처를 치유하려는 시인의 적극적인 의도이지만, 이제 현재의 삶을 치유할 수 있는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 현실은 여전히 "모본단 한 감이 아직도 통하는 세상"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조영심 시인은 이러한 비극적 풍경을 통해 역사의 그늘에서 피폐된 삶을 살아가야 했던 한 인간의 일생을 각인시킨다. (p. 시 22-23/ 론 107-108) (김병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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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그리움의 크기』에서/ 2020. 9. 20. <지혜> 펴냄
* 조영심/ 전북 전주 출생, 2007년 『애지』로 등단, 시집 『담을 헐다』 『소리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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