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들잎 경전經典
박해람
물가에 버드나무 한 그루
제 마음에 붓을 드리우고 있는지
휘어 늘어진 제 몸으로
바람이 불 때마다 휙휙 낙서를 써 갈기고 있다
어찌 보면 온통 머리를 풀어헤치고
헹굼필법의 머리카락 붓 같다
발 담그로 머리 감는 갠지스 강의
순례객 같기도 하고.
낙서로도 몇 마리의 물고기를
허탕치게 하는 재주도 부럽고
낙서하기 위해
몇십 년을 허공으로 오른 다음에야 그 줄기를
늘어뜨릴 줄 아는 것도 사실 부럽다
쓰자마자 지워지는
저만 아는 낙서 경전經典
지우고 또 지우는 마음이
점점 더 깊어지며 흐를 뿐이지만
물 묻은 제 마음이 물 묻은 제 문장을 읽는
제가 저를 속이는 독경獨經
지구의 모든 문장이 저와 같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참 대책 없다.
-전문-
해설> 한 문장: '낙서' 와 '경전經典'의 대조적 필법이 '낙서 경전經典'으로 통합되기까지는 부단한 인내와 초탈의 과정이 내재해 있다. "지우고 또 지우는 마음"으로 부정에 부정을 거듭하면서 "점점 더 깊어지며 흐를 뿐"인 '무심필법'이야말로 시인이 지향해온 시법의 핵심이라 할 만하다. 낙서처럼 허허로우면서도 경전과 같은 깊이를 갖는 시, 쓰자마자 지우며 늘 새로워지려 하는 부단한 갱신의 시, 완성되는 순간 미련없이 무로 돌아가는 탈속의 시가 그것이다. 경전 같은 깊이를 낙서처럼 가벼이 여길 수 있는 유연함과 담담함이 그가 지향하는 시적 태도이다. 시의 마지막 부분을 "생각해보면 참 대책 없다"라는 다소 안이한 언술로 끝맺는 것도 지나친 무거움을 덜어내고 자유로워지려는 성향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세속적 관점으로 보면 대책 없고 허무하기 그지없는 무심함이야말로 그의 시법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시인의 '무심필법'은 세속의 관심과는 무관하게 '저만 아는 낙서 경전'을 지우고 또 지우며 흘러간다. 그것은 자발적인 욕구에 의해 씌어진 낙서이지만 죽음과 허무에 대한 성찰의 깊이를 내포하는 경전과도 흡사하다. 세속적 삶에 대한 무심함이 그것에서 떨어져 죽음을 사색할 수 있는 거리를 발생시킨다. 그의 시에서는 삶보다도 죽음에 대한 상상과 성찰이 더 빈번하게 나타난다. 죽음은 삶에 이어지는 후생이며 또 하나의 세상이다. 그는 삶과 죽음의 단절감보다는 연속성에 주목한다. 그의 시에서처럼 삶과 죽음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경우는 흔치 않다. 종교에 비견될 만한 예술의 기능이 죽음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한 것이라면 박해람의 시는 그러한 기능에 상당히 충실하다 할 수 있다. 그의 시는 낙서와 경전을 아우르는 지점에서 죽음에 대한 엄숙한 존재론적 질문을 자유롭고 유연한 예술적 감성으로 전환시키려 한다. (p. 시 14-15/ 론 131-) 132) (이혜원/ 문학평론가)
-------------------
* 시집 『낡은 침대의 배후가 되어가는 사내』에서/ 2006. 6. 30. <달샘> 펴냄
* 박해람/ 1968년 강원 강릉 출생, 1998년 『문학사상』 신인 공모에 「수화手話」 외 3편이 당선되어 등단, 『백 리를 기다리는 말』 외
'시집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파동 9/ 안경원 (0) | 2020.10.23 |
|---|---|
| 십자가 위에 장미/ 안경원 (0) | 2020.10.23 |
| 유모차 외 1편/ 박해람 (0) | 2020.10.21 |
| 절벽의 반어법/ 이영은 (0) | 2020.10.20 |
| 꼭, 진주처럼/ 이영은 (0) | 2020.10.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