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위에 장미
안경원
그리스 메테오라 공중 수도원에서 사 온
둥근 계피로 만든 작은 십자가
진홍색 연분홍색 조그만 조화 장미가
송글송글 맺혀 있어
식탁 옆 하얀 벽에서는
장미꽃 닫혔다 열리는 떨림이 간혹 느껴지고
5월 장미 동산에서도 맡지 못한 향기 속에
무겁게 매달려 있는 풀지 못한 문제에서
장밋빛 피 내음이 번지기도 한다
절벽에 간신히 발을 디딘 공중 수도원에서
밧줄에 의지해 오르내리던 수도사들은
절연과 접속을 반복하며, 살아서
인간을 벗어버릴 수 있음에 도전한 것일까
수직의 암벽 저 아래 저녁이 되면
불빛이 따뜻한 사람의 마을을 내려다보며
아니다 아니다 저곳은 아니다
혹은 한걸음 더 오르리 오르리를 다짐했을까
치솟은 수직의 바위에서 보낸
한 생애의 흔적이
희게 바랜 유골들로 남아있는 그들도
죽어서야 인간을 벗어버렸겠지
작은 계피 십자가 위 조화 장미
유치한 듯 장엄한 듯
그러나 무슨 차이인가
십자가를 목에 걸든 등에 지든
삽자가 없는 삶은 없을 테니
말없이 바라보곤 한다
밤이 깊어지자 짙은 어둠 속에
바위는 안 보이고 까마득한 높이
수도원의 불빛만 별빛처럼 아득한
메테오라 공중 수도원
오스만 터키의 침공 때엔
아무도 오르지 못하는 피난처였다는데
수도사들은 공중마저도 벗어나고자 했으리라
-전문-
해설> 한 문장: 이 시에서, 그 십자가의 형상이 종교적 신성성만을 상징하는 것으로 파악하지는 않는다. 혹시 그들의 고뇌와 수행이 헛된 노동에 그치지는 않았을까? 희게 바랜 유골들로 남아있는 수도사들의 흔적은 죽어서야 인간을 벗어버린 아픈 상처는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은 이 시의 후반부에서 "작은 계피 십자가 위 조화 장미/ 유치한 듯 장엄한 듯/ 그러나 무슨 차이인가"라는 표현으로 응축되어 드러난다. 유치함과 장엄함을 느닷없이 연결 짓는 표현 기법은 십자가와 장미의 돌연한 결합만큼이나 비상식적이다. 종교적 묵상의 자세를 드러내는 경우에도 이처럼 현대미학적 감각이 적절히 구사되어 있다. 이 점이 안경원 시의 매력이며 현대적 감수성이기도 하다. (p. 시 37-39/ 론 143) (조창환/ 시인, 아주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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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십자가 위에 장미』에서/ 2020. 10. 15. <현대시학사> 펴냄
* 안경원/ 1951년 인천 출생, 1977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盆地』 『진흙이 말하는 것』 『고요의 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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