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그는 누구인가/ 김윤배

검지 정숙자 2020. 8. 15. 01:26

 

 

    그는 누구인가

 

    김윤배

 

 

  그는 늘 묘비명을 지니고 다닌다, 묘비명은 힘이라고 그는 말한다

 

  나는 시간 위에 표류해 왔다

  나는 문장 위에 표류해 왔다

  나는 사랑 위에 표류해 왔다

 

  그의 묘비명은 그가 죽은 후에도 표류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태어나기 전에 죽었다고 말한다

  그는 죽은 채 살아왔다고 말한다

 

  그는 죽은 자의 눈으로 세상을 읽었다

  그는 죽은 자의 귀로 세상을 들었다

  그는 죽은 자의 혀로 세상을 맛보았다

 

  세상은 그의 생애 위로 표류했다

 

  그의 세상은 성전 속의 악마이고 냄새나는 권력이고 더러운 배신이고 컴컴하고 오래된 도서관이었다

 

  그는 먼저 다녀간 그의 모습이 낯설다

  먼저 다녀간 그는 청춘이었다

  먼저 다녀간 그의 깊고 맑은 눈 속에 언제부터인지 칼날이 숨겨져 있었다

  먼저 다녀간 청춘이 살생자였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먼저 다녀간 그는 꽃을 품어 꽃을 죽이고 안개를 품어 안개를 죽이고 사랑을 품어 사랑을 죽였다

 

  묘비명 이후에도 살생자의 표류하는 세상은 계속될 거라고 그는 말한다

 

  죽거나 죽이지 않고는 표류하는 세상을 떠나올 수 없다고 그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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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에』 2020-가을호 <시에 시> 에서

   * 김윤배/ 충북 청주 출생, 1986년 『세계의문학』으로 등단, 시집 『강 깊은 당신 편지』 『혹독한 기다림 위에 있다』 『바람의 등을 보았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