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멸종 미안족/ 최영철

검지 정숙자 2020. 8. 14. 01:18

 

 

    멸종 미안족

 

    최영철

 

 

  뻔뻔스럽지 못한 죗값으로 누구는 다 말라빠진 밥을 먹고 오래도록 빈 밥그릇 핥고 그 빈 밥그릇도 처음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며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그러고도 남에게 몹쓸 짓 한 것 같아 자꾸 호주머니 까뒤집어 보이고

 

  그러다가 그것도 미안해 세 모녀 방문을 틀어막고 마지막 월세와 공과금과 장례비 머리맡에 올려놓고 죽었다 자신들을 치울 집주인에게 미안하다 미안하다 두 번 세 번 절하고 밀린 외상값 꼽아보고 쓰레기 분리수거보다 몇 곱절 어려운 송장 치우는 내일 아침의 수고를 생각하며

 

  미안 미안 썩지도 않고 떠돌아다닐 소문의 부스러기들이여 아무리 생각해도 다시 미안하다며 골목 한 번 말끔히 쓸고 아 미안 우리만 죽어서 정말 미안 살아서 죽어라 따라다니더니 죽어서도 찰떡궁합처럼 붙어다닐 미안

 

  그들은 이 땅에 온 마지막 미안 전령사 세상을 다 적시고도 남을 미안을 들고 내려왔으나 아무리 먹여도 배부르지 않고 아무리 뿌려도 번식되지 않는 미안은 거기서 그만 씨가 말라버렸다 주렁주렁 열렸던 미안의 탐스런 열매

 

  미안을 동네방네 뿌리고 다닌 그들 가족이 가고 나서 미안은 미안해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다 오직 하나 마지막으로 미안이라는 종자를 이 땅에 퍼트리기 위해 세상에 온 게 분명한 그들 가족이 죽고 미안족은 멸종되었다. 이제 어디서 그 안타까운 눈빛을 만날까 미안 미안해 자꾸만 시선을 땅에 묻던 미안족의 멸종은 뻔뻔스러운 난장판 세상에 내린 호된 징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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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에』 2020-가을호 <시에 시> 에서

   * 최영철/ 경남 창녕 출생, 198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찔러본다』 『돌돌』 『말라간다 날아간다 흩어진다』 등, 산문집 『시로부터』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