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줄 노트

네팔의 만다라(발췌)/ 송재학

검지 정숙자 2020. 8. 13. 23:24

 

 

    네팔의 만다라(발췌)

 

    송재학

 

 

  금강의 가루로 만들어진 만다라는 완성되면 흩어버리기에 만다라는 이후 내용에 따라 태장계와 금강계로 구분된다. 전자는 비로자나불이 체험한 성불의 경지를 의미하는 대일경대의 세계이고 후자는 밀교에서만 사용되는 의식과 진언을 상징하는 금강정경의 세계이다. 또한 전자는 하나에서 여럿을 향해 움직이고 후자는 여럿이서 하나를 향해 움직인다. 티베트에서 내가 본 만다라는 오색의 모래인데 의식을 행하고 나면 단을 허물어 형체를 없애버린다. 사라지는 만다라야말로 진정한 법신이지만 세속의 나로서는 만지고 냄새가 나는 만다라가 필요했다. 그러기에 네팔의 어썬바자르에서 덥석 만다라를 구입했다. 물론 그곳의 만다라들이 요즘 제작된 것이 분명할 터이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내 엉터리 같은 견성이 잠시 머물면 족한 것을./ 그때의 만다라 여러 점은 이리저리 흩어지고 한 점만이 내 곁에 머물고 있다. 내가 소장한 지도 이미 십 년이 훨씬 넘었기에 다정하고 익숙하다. (p. 70)

 

  눈동자가 달린 것들을 먹지 않겠다는 결심을 한때나마 유지했다. 물론 말의 눈을 삼켰던 끔찍한 시절이 있긴 했다. 몽골에서 게르의 주인이 권한 말의 눈동자는 익히긴 했지만 지금도 소스라치는 기억이다. 그때 나는 말이면서 말의 외부였던 환상에 사로잡혔다. 질겅거리다가 문득 삼킨 말의 눈은 내 안에서 내내 커다란 눈을 뜨고 있었다. 말의 눈에 혓바닥이 생겨 말을 한 것은 아니지만 어떤 소리는 분명 오래 머금었다. 말의 울음에서 비롯된 진부한 소리였고 게다가 나를 응시하는 눈이기도 했다. 미안하지만 내가 삼킨 두 개의 눈동자 중 하나는 내 입 안에서 으깨어지면서 먹물이 튀자마자 삼켰기에 그 맛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때부터 눈동자가 달린 것을 먹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채식을 시작했다가 겨우 몇 달 만에 작파했다. 하지만 눈을 가려도 고기를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풀과 과일에도 눈이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네팔에서 닭의 눈을 보았다. 닭의 눈은 얇은 종이를 오려서 붙인 듯 보통 감정이 배어 있지 않다. 하지만 난드룩에서 촘롱까지 셀파들이 우리 일행의 한 끼 식사를 위해 가져간 닭의 눈들은 인형의 눈이 아니었다. 많은 말을 숨긴 눈이거나 많은 말을 이미 뱉었던 눈이다. 눈의 주파수가 다르지만 일행들은 그 눈의 주파수에 감응이 되었다. 다시 말의 눈동자를 삼킨 것과 비슷한 감정이 치솟았다. 그날 저녁으로 나온 닭고기를 한 점도 못 먹었거니와 이후 또 닭에 대한 비애가 생겼다. (p. 7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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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인동네』 2020-8월(통권 88/ 종간)호 <사물의 생각>에서

  * 송재학/ 1986년 『세계의문학』으로 등단, 시집 『내간체를 얻다』 『날짜들』 『슬프다 풀 끗혜 이슬』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