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의 요구(부분)
박동억
1. 나르시시즘의 시대
나르시시즘에 관한 흥미로운 우화가 있다. 나르키소스가 죽자 초원의 꽃들은 깊은 슬픔에 잠겼다. 꽃들은 강물에 찾아가 나르키소스를 애도할 물방울을 달라고 요청했다. 강물은 그 요청을 거절하며, '그럴 수 없어요. 내 물방울이 눈물이 된다면 나르키소스를 애도하기 위해 필요한 물이 부족해질 거예요. 나는 그를 사랑했어요.'라고 답했다. 그러자 꽃들은 나르키소스가 매일 강물에 얼굴을 비추는 동안, 강물이 바라본 나르키소스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물었다. 강물은 잠시 머뭇거리면서 그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답했다.그는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내가 그를 사랑했던 것은, 그가 내 위로 몸을 숙일 때마다 그의 눈 속에 비친 내모습을 볼 수있었기 때문이랍니다.1)
이것은 눈앞에 나타나 있는 타자를 외면하는 시선에 관한 이야기이다. 나르키소스와 강물은 마주 보고 있는 연인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상대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나르키소스는 강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고,강물은 나르키소스 눈동자 속에 비친 자신을 사랑할 뿐이다. 이때 인식되지 않는 것은 타자의 얼굴이다. 본래 얼굴은 타자를 향해 있다. 누구도 두 눈으로 자신의 얼굴을 직접 보는 것이 불가능하듯 얼굴은 항상 타자에게 먼저 발견된다. 또한 얼굴은 응답을 요구한다. 타인의 미소에 미소로 응답하거나, 타인의 침묵에 침묵으로 응답하는 것을 우리는 대화라고 부른다. 그러나 얼굴을 자기 소유로만 간주할 때, 얼굴은그저 각자의 존재에 대한 독백이 된다. 나르키소스와 강물처럼, 나르시시스트에게는 응답해야 할 타자의 얼굴, 그리고 타자의 죽음조차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들을 장님으로 만든 것은 '자기'에만 몰두하는 상태이다. 타자의 얼굴이 눈앞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을 떄, 자아는 외부와 단절하고 타자의 고통을 손쉽게 외면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자신 또한 타자의 타자로서, 자신의 얼굴이 타자에게 드러나 있다는 사실이 무시될 때 인간은 유령이 된다. 하지만 우리가 마음이라는고독한 장소에 속해 있다고 상상하기 이전에 우리의 마음은 얼굴을 통해 드러나고 있으며, 우리는 말로서 고백하는 존재이기 이전에 얼굴을 통해 드러난 존재이다.2) '자기'보다 앞서는 것은 얼굴이다. 이처럼 얼굴의 본질은 타자를 향한 열림이자 응답의 요구이다.
중요한 것은 현대사회에서 시련을 겪는 것은 관계가 아니라 얼굴이라는 점이다. 관계는 단절된 적 없을뿐더러 오히려 현대인들은 과잉 연결되어 있다. 코로나 사태 이래 디지털 매체의 도입이 가속화된 이후에도, 매일 많은 사람은 소셕 네트워크에 자신의 고통과 상처를 전시하고 온종일 메신저로 연락을 주고받는다. 일상에서는 자신을 표현하기 어렵다고 느끼는 사람도 트위터나 페이스북에서는 손쉽게 자기 생각과 모습을 전시한다. 이때 '손쉬움'이란 응답하고 응답받아야 하는 얼굴이 잊힌 상태를 의미한다.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을 차단하고, 타인의 반응에 '좋아요'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되는 관계, 누군가와 대면하고 있다는 흐릿한 인상만을 남기는 그러한 손쉬움이 새로운 관계방식이 된다. 이러한 관계에 얼굴은 없다. 유명인의 사진이 수십 개의 게시판에 유포되고 손쉽게 품평의 대상이 되듯, 일방적으로 바라보기만 할 때 타자의 얼굴이 나의 악플로 인해서 상처 입을 수 있다는 사실은 쉽게 잊힌다.3)
우리가 숙고해야 할 사실은 현대사회가 우리에게 주입하는 관계 방식이 곧 나르시시즘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현대사회에서 흔히 사용되는 관계 단절이라는 표현은 현상적으로는 관계나 소통의 단절이 아니라, 얼굴의 존재를 잊는 데서 시작한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기업 내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 취업 시장 등 모든 분야에서 무한경쟁 관계를 확립한다. 이러한 제도 안에서 관계는 느슨한 상호헌신적인 동시에, 분명히 '나의 삶'이라는 과제에 필요한 도구이다. 장래희망, 취업, 결혼, 건강보험, 국민연급 등 수많은 제도는 곧 강제된 일방통행의 과제이며, 우리는 그 과제를 진지하게 다루면서 어렵지 않게 타자의 얼굴을 외면한다. 친구는 곧 한정된 취업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상대이며, 이러한 제도 안에서 학생들의 집단 따돌림, 즉 타인의 얼굴을 외면하는 능력 양성을 학교의 진정한 기능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놀랍지 않다.4) 이 시대의 학교가 응답하는 얼굴은 바로 승리자의 얼굴이고, 장래희망이나 처세서는 승리자의 얼굴에 대한 충실한 받아쓰기가 되어간다.
따라서 타파되어야 하는 것은 관습적 관계이고, 드러나야 하는 것은 얼굴이다. 타자에게 타자로서 응답하는 대면, 때론 전율하게 하고, 때론 섬뜩하고 불쾌하기도 한 이 대면을 요구하는 것은 사회의 흐름을 역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문학이 요구된다. 문학은 한 사람의 고독한 글쓰기에 대한 한 사람의 고독한 응답이자, 그 응답의 적당한 거리를 탐색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최근 문단에 제기되고있는 젊은 평론가들의 비판 역시 우리는 이러한 얼굴의 요구로 번역해볼 수 있다. 문단 역시 현대사회의 전반과 마찬가지로, 등단제도와 문학상으로 작가들을 경쟁하게끔 유도하는 구조를 형성해왔으며, 표절과 원고료 착취 등을 은폐하며 지속해왔다는 비판은 우리가 숙고해보아야 하는 사실이다. 또한 문학이 오랫동안 이성애자 남성에게만 편향되게 응답해왔으며, 도리어 여성과 퀴어는 외면해왔다는 비판 역시 통렬한 것이다.
문학조차 두 가지 경우에 나르시시즘에 사로잡혀 타자를 소홀히 대했다고 말할 수 있다. 때로 문학은 신념의 표현인 것처럼 간주되었다. 하지만 맹목적으로 자기 신념에 사로잡힌 작가는 자칫 타자의 얼굴을 잊게 된다. 타자를 바라봅며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신념을 바라보며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타자를 외면하는 괴물이 된다. 한편 문학은 무엇이든 꾸며낼 수 있는 가면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의 상상력에 사로잡힌 작가는 하소연할 뿐이다. 그는 때론 자기 존재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성별을 바꾸고, 때론 인간이라는 범주까지도 벗어나지만, 타인의 얼굴에 응답할 자신의 얼굴을 폐기한 채 말하고 있다. 주체의 얼굴이든, 비정형의 가면이든, 타인의 얼굴을 응시하지 않을 때 목소리는 명령이나 하소연으로 전락하고 만다. 명령하는 자는 자신의 의도에 따라 타인을 도구화하는 괴물이고, 하소연하는 자는 다만 독백을 벗어나지 못하는 유령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금 물어야 한다. 나르시시즘의 시대에 문학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가. 응답이 사라진 시대에 문학은 얼굴을 어떠한 고뇌의 대상으로 삼는가. 현재진행형으로 한편에 낭독이라는 실천적 응답이 있고, 다른 한편에 시 창작이라는 미학적 모색이 있다. 이 글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후자 쪽이다. 얼굴이 하나의 시련으로 전락한 시대에 관계를 모색하는 시인들의 시를 살피는 것, 떄로 이 시대에 사로잡히고 때로 이 시대로 인해 몸부림치는 그들의 고뇌를 빌려 응시의 가능성을 타진해보는 것이다. (P. 129~134 )
1) 이 우화는 앙드레 지드가 기록한 오스카 와일드의 목소리이다. 「오스카 와일드를 기리며」, 『심연으로부터』, 문학동네, 2015, 251~252쪽 참조. 김우창은 나르시시스트의 사랑은 '애기(愛己, amour propre)라고 부른다. 애기란 '타인의 눈에 비치는 외면적 효과와 평가로서 값 매김하려는 이기적 자기 사랑'을 뜻한다.
2) 오랫동안 우리는 고독하고 단일한 주체 개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것은 특수한 역사적 구성물이다. 찰스 테일러는 『자아의 원천들』에서 고대 그리스인이 현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주체를 상상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한 바 있다. 마음은 여러 장소에 존재하거나 신이 불어넣은 것으로 상상되곤 했다. 이러한 고대의 자아 개념을 망각하고, 아우구스티누스-데카르트-흄을 거치면서 자아는 단일하고 이성적인 주체 개념으로 다듬어진다. 가리타니 고진의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에서 논의된 바는 바로 그러한 근대적인 주체 개념의 형성에 문학이 결정적인 역할을 맡았다는 사실이다. 고진에 따르면, 문학에 언문일치 형식을 도입하는 동안 외부 세계로부터 등을 돌린 '내면적 인간'이 하나의 문학 제도로서 확립되었으며, 이러한 내면적 인간은 거대한 시스템 내의 소시민으로 전락한 근대인이 다시금 자신을 '주인'으로 상상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3) 그것이 단지 사진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고등학교 앨범사진이 그리운 얼굴을 상기시키는 데 반해, 전시된 얼굴은 단지 사물처럼 감상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감상하는 자가 아예 자신에게 얼굴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고 익명성 뒤에 숨을 때 그의 태도는 관음이 되고, 관음하는 자는 손쉽게 타자에게 폭력을 가할 수 있다. 연예인들의 자살 사건, n번방 사건 등을 겪으며 우리는 관음증에 깃든 성 권력의 불균형과 잔혹을 깊이 자각하게 되었다.
4) 사회학자 엄기호는 한국 사회가 책임과 위험을 하층민에게 전가하고 이익은 상층민이 가져가는 일종의 다단계회사 또는 '유흥주점적 경제모델'에 가깝다고 비판한다. 그런데 "이 유흥주점적 모델에서 노동자에게 요구되는 단 하나의 덕목은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능력"이며, 학교는 "왕따와 학교폭력이 벌어질 떄마다 학생들이, 아니 학교 구성원 전체가 훈련하는 것이 이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능력"이라는 점에서 '잘 굴러가고 있는 공간'인 셈이다.(엄기호, 『단속사회』, 창비,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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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동네』 2020-가을(통권 88/ 종간)호 <징후들> 에서
* 박동억/ 2016년 ⟪중앙일보⟫ 중앙신인문학상 평론 부문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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