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달불
안윤자/ 수필가
우리나라에 전깃불이 처음 들어온 곳은 건청궁이다. 궁궐 속의 궁이라 불린 건청궁은 경복궁 후원 깊숙이 자리한 한옥의 별궁이었다. 구한말의 어수선한 시국에서 고종은 강녕전과 교태전을 비워 두면서까지 세자 내외와 단출하게 건청궁에서 거하며 국사에 임했다.
1887년 3월 6일 건청궁에서 유사 이래 최초의 전깃불이 밝혀졌다. 장안당과 곤녕합, 향원정 주변으로 전기를 가설하였는데 에디슨이 백열등을 발명한 지 8년 후의 일이다. 보빙사로 미국에서 신세계를 보고 돌아온 대표단이 올린 중요한 건의가 전등의 설치였다. 백열등은 당시로는 로켓 발사 이상의 최첨단 문명의 이기가 아닐 수 없었다.
"무슨 날도깨비 같은 전깃불 타령인고? 반딧불 밑에서도 끄떡없이 잘 살아왔느니." 고종의 시큰둥한 반응에 전권대신 민영익은,
"전하! 칠흑 같은 밤이 대낮처럼 환해지니 인왕산 범들이 감히 후원을 범하지는 못할 것이옵니다. 무엇보다 국운이 활활 일어나 전하의 치세가 창대해질 것이옵니다." 하고 응수했다.
건청궁의 전깃불은 근대화에 앞서간 일본과 중국보다도 빠른 가설이었다. 에디슨은 지구상의 오지, 극동의 은둔국 조선 임금에게서 전기 가설을 요청하는 서한을 받자 몹시 흥분하여 그날의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오오 맙소사, 세상에 이런 일이! 동양의 신비한 은자의 왕국에서 내가 발명한 전등이 켜지다니 꿈만 같은 일이다."
뉴욕 에디슨 전기회사와 전등 설비 계약이 완료되자 1886년 11월 전등기사 윌리엄 매케이(W. Mekey)가 그 먼 지구의 끝 아메리카에서 태평양을 건너 수만 리 길을 불문곡직하고 달려왔다. 매케이는 경복궁에 설치할 전기 발전소의 터를 찾는다고 열심히 수색하고 다녔다.
마침내 향원지 남쪽과 영훈당 북쪽 사이의 장소를 한 곳 찾아내어 1887년 1월 전기등소를 지었다. 극동에 세워진 최초의 전기 발전소다. 향원지의 물을 발전기로 뽑아 올려 불을 밝히자 사람들은 전깃불을 '물불'이라 하며 놀라워했다. 물로 만든 불이라 하여 물불이 된 전깃불은 이름처럼 하룻밤 새에도 수도 없이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하는 참말로 물불을 못 가리는 전깃불이었다.
호롱불이 전깃불로 대체되었다는 것, 그것은 칠흑 같은 밤의 야성이 전설의 문을 닫고 퇴장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밤중 으슥한 뒷간에서 쏙 튀어나오는 공포의 빨간 손 이야기며 시도 때도 없이 출몰하는 달걀귀신과 싸리 빗자루 도깨비들이 환한 신식 불에 밀려나서 신화 속의 옛날 얘기로 사라져 갔다. 전깃불은 진정 에디슨이 놀란 수준을 넘어선 창망한 조선의 개명이었다.
심봉사가 눈을 뜬들 이보다 더 신기하랴. 중전은 낮처럼 환해진 밤에 잠들기가 아깝노라, 하고 옥호루를 서성이다가는 정시합에 들어앉아 밤이 깊도록 독서 삼매경에 빠져들었다. 그런 전깃불이 자주 심통을 부렸다.
깊은 밤 단정히 서책과 벗하고 있을라치면 '물불'이 철없이 훼방을 놓아 깜빡깜빡거리다가 탁하고 나가곤 한다. 그럴 때마다 순식간에 건청궁은 바닷속 같은 심연으로 빠져들었다. 밝았다 어두워지니 더 캄캄하지 않았겠는가. 여기저기서 등촉을 찾느라 수선거리고 그 후로는 백열등 아래에 촛대를 항시 대령해 놓았다.
술 취한 건달꾼이 제멋대로 몸을 흔들거리듯이 하룻밤에도 몇 번씩이나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하며 백열등이 건들대니 이를 가만히 눈여겨보던 중전이 '물불'에게 '건달불'이라고 새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런 건달불이나마 인왕산 호랑이를 쫓아내 준 에디슨에게 국왕 내외는 진정 고마워했다. (p. 37-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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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문학』 2020-8월호 <특별기획/ 대표에세이의 저력과 그 위상> 에서
* 안윤자/ 1991년 『월간문학』으로 수필 부문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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