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동백꽃이 지면/ 김영빈

검지 정숙자 2020. 6. 26. 18:14

 

 

    동백꽃이 지면

 

    김영빈/ 시인

 

 

  여러분은 사람에게 동백꽃을 받아먹는 사슴을 보신 적 있으신가요? 제가 근무하는 곳에는 사슴들이 무척 많이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작년까지만 해도 저는 공공연하게 사슴들과 앙숙이라고 말하곤 했었지요. 애써 심어놓은 꽃들과 나뭇잎들을 녀석들이 죄다 뜯어먹곤 했기 때문입니다. 개체 수는 많은 데다 먹이가 충분하지 않으니 한편으로 사슴들이 짠해 보일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숙소 옆 동백나무 아래에 자주 나타나는 수사슴 한 마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순종은 아니지만, 털에 보이는 흰 꽃무늬로 봐서 꽃사슴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그 사슴을 관찰해 보겠다고 족히 한 달 정도는 졸졸 쫓아다녔던 것 같습니다. 한번은 밤늦은 퇴근길에 숙소 주차장 옆 잔디밭에 엎드려 있는 그 녀석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평소엔 꿈도 못 꿀 일이었지만, 2m 앞에까지 조심조심 다가가 아예 엉덩이를 깔고 앉아 대담하게 영상을 찍었습니다. 사슴이 말대답을 해 줄 리도 만무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20여 분간 사슴에게 이런저런 말을 계속 속삭였습니다. 그 영상을 본 페친들은 신기하다고 난리였고, 정작 당사자인 사슴은 평온한 표정으로 계속 엎드려 있는 것이었습니다.

 

  [사진: 봄밤, 동백이] (※ 블로그주: 책에서 감상 바랍니다)

 

 

  다음 날 늦은 오후에도 사무실 사람들과 걷기 운동을 하다가 같은 자리에서 풀을 뜯고 있는 그 사슴과 다시 마주쳤습니다. 이번에는 조금 더 대담하게 동백꽃을 하나 따서 낮은 자세로 앉아 조심스레 내밀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세상에!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내 다가와 제 손에 들린 꽃을 송아지처럼 온순하게 받아먹는 게 아닌가요! 너무도 놀랍고 신기하여, 동백꽃을 계속 따서 먹여 주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인연이 매일매일 반복되다 보니, 어느샌가 그 사슴에게 사과, 오렌지, 배추, 상추 같은 먹이를 계속 구해다 먹이고 있는 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동백꽃을 잘 먹는지라 우리 사무실에선 공식적으로 녀석의 이름은 '동백이'가 되었고, 더불어 저는 졸지에 '동백이 아부지'가 되었습니다. 동백이는 이제 사람이 두렵지 않은지 다른 이들이 동백꽃을 따 줘도 다가가서 받아먹곤 했습니다. 그런 행동이 가끔 질투 날 때도 있지만 제대로 못 먹고 겨울을 났던 걸 생각하면 이해 못 해 줄 일도 아니었습니다.

 

  [사진: 봄밤, 동백이와 함께] (※ 블로그주: 책에서 감상 바랍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했습니다. 이곳에 사는 사슴이 줄잡아 200마리가 넘는다고 하던데, 사람에게 다가오는 사슴은 동백이가 유일하니, 녀석이 이제는 여기에서 제일 보배 같은 존재입니다.

  길 가다 어쩌다 마주치면 귀찮을 정도로 동백이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되도록 눈을 안 마주치며 조금씩 조금씩 가까이 다가가는 오랜 기다림을 통해 동백이는 이 사람이 자기를 해치지 않을 거란 걸 알아차렸을까요? 좀처럼 곁을 주지 않는 야생 사슴에게도 사람의 진심이 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동백이가 가르쳐 주었습니다.

  요즘은 사무실 뒷동산 솔밭에서 동백이에게 먹이를 주곤 하는데, 사슴 한 마리가 와샤샥 사과를 베어 먹고, 오독오독 배추를 씹어 먹는 소리를 들으며 이렇게나 큰 힐링이 될 수 있다는 걸 예전엔 미처 몰랐습니다.

  저의 폰 사진첩을 열어보면 그동안 찍은 동백이의 사진이 잔뜩 들어 있습니다. 첫 사진 시집에서 저는 사슴들과 앙숙이라는 표현을 썼었지만, 이제 두 번째 책에서는 그 말을 수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동백이 때문에 사슴에 대한 인식도 바뀌었고, 요즘처럼 사슴이 먹는 먹이에 이렇게 관심을 많이 두어본 적도 없습니다. 동백이를 소재로 한 디카시도 아마 여러 편 쓰게 되겠지요.

  동백꽃을 우아하게 잘 받아먹는 우리 동백이. 동백꽃이 다 지고 나면 매일 오는 동백나무 아래에 잘 오지 않을까 벌써부터 걱정이 됩니다. 마음 같아선 그래도 가끔은 특식을 얻어 먹으러 놀러와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도 손에 뭔가를 들고 앉아, '동백아~' 하고 부르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다가오곤 하는 녀석을 더 못 보게 된다면, 왠지 무척 서운한 마음이 들 것 같거든요. (p. 180-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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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간 『시마詩魔』 제4호 2020. 06. <김영빈의 dica 詩앗>에서

   * 김영빈/ 2017년 <이병주 하동국제문학제> 디카시 공모전 최우수(1위), <황순원 문학관> 디카시 공모전 최우수(2위), 사진시집 『세상의 모든 B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