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독사가 창궐하는 세상/ 박찬일

검지 정숙자 2020. 7. 21. 14:59

 

 

    독사가 창궐하는 세상

 

    박찬일

 

 

  플라톤에 의할 때, 영혼이 먼저 존재했었고 영혼의 세계에서 진리를 말할 수 있었다. 영혼이 육체의 옷을 입은 후, 육체의 세계에서 진리를 말하기 어렵게 되었다. 플라톤 철학의 주요 용어들인 메텍시스, 아남네시스, 레테의 강, 알레테이아 등이 이에 대해 말한다. 메텍시스는 진리의 '분유'를 말한다. 영혼적 세계에서 진리의 分有를 말할 수 있다. 아남네시스는 진리에 대한 '상기'를 말한다. 육체적 세계에서 진리를 느끼게 되는 순간을 말할 때 이것이 아남네시스, 즉 진리에 대한 想起에 관해서이다. 레테lethe의 강은 진리의 망각을 말한다(영혼이 레테의 강, 곧 망각의 강을 건너 육체적 현실의 세계에 들어오면서 진리를 망각한다. 레테의 강물을 많이 마신 영혼이 '진리'를 많이 망각하고, 적게 마신 영혼이 진리를 적게 망각한다). 레테의 강에 뿌리를 둔 알레테이아aletheia는 진리로의 복귀를 말한다. 플라톤의 『파이돈』에 "모든 아름다운 것들이 아름다운 것 자체에 의해서 아름답게 된다."라는 말이 나온다. 진리는 '~인 것 자체auto ho esti'를 지시한다. 진리의 다른 말이 이데아, 혹은 에이도스eidos이다. 알레테이아는 진리를 탈은폐시키려는 의지, 곧 진리에의 의지를 포함한다. 

  플라톤의 또 다른 용어들로서 에피스테메와 독사가 있다. 플라톤에 의하면 진리, 혹은 진리에 대한 지식인 에피스테메epistemes가 지배하는 진짜 세상이 있고, 독단(혹은 억견)을 뜻하는 독사doxa가 지배하는 가짜 세상이 있다. 에피스테메에 압도된 세상이 진짜 세상이고, 독사에 압도된 세상이 가짜 세상이다. 플라톤에 의하면 '우리는, 가짜 세상에 살고 있다.' 진짜 세상은 저 너머에 있다. 플라톤 철학의 기독교적 해석에 의하면, 우리는    진짜 세상인 來世바라기하면서    가짜 세상인 현세에 살고 있다. "2,000년 동안의 서양철학은 모두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했다." 화이트헤드가 그의 『과정과 실재』에서 남긴 유명한 말이다.

  '플라톤'을 대입해서 말할 때, 작금의 세상은 진리에 대한 갈망이 부재하는 세상으로서, 독단(혹은 臆見)이 판치는 세상으로서 진짜 세상이 아닌 가짜 세상이다. [독사가 창궐하는 세상이다.] 플라톤의 '침대의 비유'를 원용하면, 침대 그 자체에 대한 관여participation 관심은 부재하고, 침대 그 자체[침대의 이데아]에서 멀어진 여러 가지 침대들이 판치는 세상이다. '침대 그 자체'에서 두 단 더 밑에 있는 '침대에 대한 그림들'이 판치는 세상이다. 

  명석 판명한 이성이 아닌, '이곳 저곳을 기웃대는 감성'이 판치는 세상이다. 이성적 합리주의보다는 순간적이고 충동적인 욕망이 긍정이 되고, 그것이 압도하는 세상이다('나는 욕망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지식을 의견이 압도하고, 팩트보다는 이야기들-픽션들이 압도하는 세상이다. 본질에 대한 통찰보다 '그저 하나의' 관점이 중시되는 세상이 됐다. 자기가 선호하는 것, 자기에게 유리한 것만 받아들인다. 자기가 믿고 싶은 견해-통계-실험만 받아들이는 '확증 편향'이 대세인 시대가 됐다.

  이렇게 된 데에는 '진리 찾기'를 단념한 후기모더니즘의 전파자들, 분열된 주체를 말하는 후기구조주의의 전파자들이 한몫한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인간은 그저 어두운 충동에 이끌리는 존재일 뿐인가? 인간은 그저 '욕망하는 기계'일 뿐인가? 물론 후기구조주의 및 후기모더니즘이 민주주의에 기여한 점을 부인할 수 없다.

  독사는 나중에 하이데거가 말한 '세상 사람'[俗人, the Man]의 삼중적 모습, 즉 호기심 및 잡담, 그리고 애매성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호기심 및 잡담, 그리고 애매성(혹은 애매한 태도)가 발전하여 독사가 된다. '호기심' 및 '잡담', 그리고 '애매한 태도'가 압도하는 세상이 아닌가? 호기심-잡담-애매성에 진리가 없다. 진리에 대한 의지가 없다. 진리가 떠나버린 시대다.

  우리는 시간에 갇힌, 곧 한계에 봉착하게 될, 그러므로 불안을 느끼며 살아야 할 존재자들이다. 한시적인 삶을 사는 불안한 존재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진리에 대한 지속적인 물음이다. 그것이 존재론적인 것이든, 정치-사회적인 것이든 진리에 대한 지속적인 물음이다. 요청되는 것은 사실에 대한 열망이고, 무엇보다도 '은폐된 사실'을 탈은폐시키려는 의지이다. '계몽주의'로의 복귀를 말한다. 칸트가 그의 「계몽이란 무엇인가?」(1784년)에서 자립적 존재를 말하고, 그래서 '미성년상태에서 빠져나와 너 자신의 오성을 사용할 용기를 내라!'고 촉구한 것은 지금 여기에서도 여전히 유효막심하다. (p.253-2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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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가』 2020-여름호 <예술가 산책> 에서

   * 박찬일/ 1993년 『현대시사상』 으로 등단, 시집 『나비를 보는 고통』 『인류』 『아버지 형이상학』 등, 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