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허물
신철규
빛 속에서 눈을 감고 있으면 영원히 멈추지 않는 회전문에 갇혀 있는 느낌
네가 해를 등지고 있을 때
너는 찡그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시린 과일을 한입 베어 문 것처럼
영점을 맞추는 사수처럼
한쪽 눈이 찌르르 감겼다
진갈색 마룻바닥에 흥건하게 고인 빛
끈적끈적한 그림자
우리가 서로를 안을 때 네 심장은 내 심장보다 조금 아래에서 뛴다
같은 높이에서 뛰기 위해 내가 발뒤꿈치를 살짝 들어올릴 때
윗니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린다
꿈에도 모르는 일
꿈속에서 물고기들은 눈을 뜨고 있습니다
닫을 눈꺼풀이 없어서
무서워도 눈을 감지 못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실명失明은 빛을 잃는 것
우리가 꿈속에서 함께 지었던 집들이 하나둘 무너져 내리고
희미한 이름들이 컨베이어 밸트 위에 실려간다
봉인된 기억들이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고
한번 떠나면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빛처럼
방심放心하면 마음은 돌아오지 않는다
귓속으로 들어간 말을 바람이 씻어낸다
깨진 병은 어떤 물도 담을 수 없다
창으로 들어온 햇살에 먼지들이 살아 움직인다
창틀 위 유리컵에 담긴 구름
기포를 뿜으며 가라앉는다
-전문, 『현대시』 2020-6월호
▶ 창문을 뚫고 들어온 실빛은 이마 위로 떨어지는 새벽빛과 다르고 마룻바닥에 흥건하게 고인 고적한 빛과도 다르다 빛은 모두 같은 빛인데 왜 모두 다른가(발췌)_ 문종필/ 문학평론가
"윗니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린다"// 이 한 구절에서 독자들은 멈출 수밖에 없을 것이다. 화자와 당신의 관계가 이 구절에서 산산이 부서지기 때문이다. 이 글을 잃고 있는 독자들은 두 눈을 감은 채 무거운 망치로 자신의 윗니를 톡톡 쳐 보시라. 윗니가 부러질 정도로 내리쳐 보시라. 어떤 느낌이 드는가. 혼자서 하기가 부담스럽다면 깊게 잠들어 있을 때, 가족들에게 내 윗니를 톡톡 두들겨 달라고 부탁해보자. 당신의 모든 감각은 윗니에 집중될 테고, 달콤했던 낮잠은 곧바로 무너질 것이다. 화자와 당신과의 관계도 이와 유사하다. 이 흔들림 이후, 화자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듯 체념의 자세를 보인다. 이러한 상황을 화자는 '빛'으로 비유하는데 이 지점이 인상적이다. "한번 떠나면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빛"과 "실명失明은 빛을 잃는 것"이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한번 스쳐 지나간 인연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더 이상 우리는 그 순간을 다시 경험할 수 없다. 그것이 가능하더라도 그 빛은 예전의 그것과 같지 않다. 내가 변해가는 것처럼 그 빛도 변해갈 테니 말이다. (p. 시 218-219/ 론 223-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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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시』 2020-7월호 <현대시작품상 이달의 추천작>에서
* 문종필/ 문학평론가, 2017년 『시작』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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