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물
이병률
칼갈이 부부가 나타났다
남자가 한번, 여자가 한번 칼 갈라고 외치는 소리는
두어 번쯤 간절히 기다렸던 소리
칼갈이 부부를 불러 애써 갈 일도 없는 칼 하나를 내미는데
사내가 앞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두 사람이 들어서기엔 좁은 욕실 바닥에 나란히 앉아
칼을 갈다 멈추는 남편 손께로 물을 끼얹어주며
행여 손이라도 베일세라 시선을 떼지 않는 여인
서걱서걱 칼 가는 소리가 커피를 끓인다
칼을 갈고 나오는 부부에게 망설이던 커피를 권하자 아내가 하는 소리
이 사람은 검은 물이라고 안 먹어요
그 소리에 커피를 물리고 꿀물을 내놓으니
이 사람 검은 색밖에 몰라 그런다며,
태어나 한번도 다른 색깔을 본 적 없어 지긋지긋해한다며 남편 손에 꿀물을 쥐여준다
한번도 검다고 생각한 적 없는 그것은 검었다
그들이 돌아가고 사내의 어둠이 갈아놓은 칼에 눈을 맞추다가 눈을 베인다
집 안 가득 떠다니는 지옥들마저 베어낼 것만 같다
불을 켜지 않았다
칼갈이 부부가 집에 다녀갔다
-전문-
▶처연의 묵시록默視錄/ 커버스토리_이병률(발췌)_ 김건영/ 시인
작년부터 중학생들에게 시를 가르칠 기회가 생겼다. 좋은 시편들이 많지만 수업 시간에 빼놓지 않고 읽어보는 이병률 시인의 시가 있다. 「검은 물」이라는 시다. 좋은 작품은 우리가 겪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타인의 마음을 조금은 간신히 알 수 있게 해주는 일이라며, 타인을 조금 더 이해한다면 우리 삶이 좀 나아지지 않겠냐고 말하곤 한다. 그리고 좀 철없이 웃으라고 덧붙인다. 여러분 사실 문학도 덕질(어떤 분야에 몰입하여 열성적으로 파고드는 일을 일컫는 인터넷 용어)이에요. 문학 덕질하다가 시인이 됐으니 저는 성덕(성공한 덕후)이죠.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마음을 알기는 그토록 어려운 일이건만, 가끔 시인들은 그것을 해낸다. 내가 시인이 되고 싶었던 이유가 바로 이런 것 때문이었다.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그래서 본 것을 말하고, 그저 말하는 것으로, 슬픔으로도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p. 126-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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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시』 2020-7월호 <커버스토리_이병률>에서
* 이병률/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바람의 사생활』 『눈사람 여관』 등
* 김건영/ 시인, 2016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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