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해
-공동묘지를 떠나며
김영산
푸른 해는 공동묘지에 있었다. 산 자체가 푸른 해이기도 하지만 산 사람은 알아볼 수 없다. 우리는 죽어야 했는가.
푸른 소주병을 하루에 두세 개 비우는 고향 친구와 옆 동네 산에 갔었다. 왜 그 친구는 나를 그곳에 이끌었는지, 결국 우리가 이른 곳은 공동묘지였다.
공동묘지라고 하기에는 좀 그랬구나. 무덤이 십여 기. 벌써 십 년이 흘렀지만 또렷한 흔적들. 공동묘지만 남기고 동네 십여 개가 사라져버렸다. 공동묘지에서 내려다본 거대한 빌딩도 비석처럼 작아 보였다. 그 비석들이 세워지기까지 딱 십 년이 흘렀다.
한국전력공사 비석이 젤 큰 데, 나주 비료공장 하얀 굴뚝 연기를 바라보며 자란 나는 아직도 불 켜진 빌딩들 벌판이 믿어지지 않는다. 순식간에 우리 모두 죽을 수 있다.
푸른 소주병을 들고 그 친구는 고향의 장례를 치렀다. 나는 시의 장례를 치렀다. 지구의 장례가 치러지고 있다는 걸 우리는 안다. 푸른 소주병을 비석처럼 세워 가도 취하지 않는 죽음. 누구의 무덤인지도 모르고 무덤은 반갑구나.
무덤은 비장하지 않다. 푸른 해이기 때문인데, 나는 그때 무덤과 무덤이 푹 꺼진 곳이 푸른 해라는 걸 몰랐다. 마치 은하의 중심마다 있다는 음의 태양 그 푸른 해같이 죽음의 중심을 잡아주는지 모른다.
나는 열심히 무덤을 바라보았다. 무덤의 소주병은 주둥이가 길지 않지만 침묵만큼은 잘 마신다. 푸른 해들이 무덤만큼 많구나. 더 큰 침묵이 작은 침묵을 마시고 보이지 않는 푸른 블랙홀이 침묵을 마신다.
여태 그 친구는 푸른 소주병을 세고 있다.
-전문-
▶ 샴쌍둥이의 변증법/ _숭고한 타자(발췌)_ 박동억/ 문학평론가
공장과 빌딩으로 메워진 고향은 폐허나 다름없다. 공동묘지에서 두 사람은 애도하기 시작한다. 친구가 고향의 상실을 애도하는 동안, '나'는 시의 상실을 애도한다. 이때 고향의 상실과 시의 상실은 함께 놓인다. 고향 상실은 과거에 간직했던 추억의 상실일 뿐만 아니라 한 존재에 내밀하게 응답하던 장소의 소실이기도 하다. 하이데거는 시의 본질은 바로 그러한 장소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시란 존재를 존립하게 하는 장소를 드러내는 말하기인데, 고향 상실은 시가 말할 장소를 상실하게 한다./ 그러나 김영산 시인은 장소 상실에도 시는 지속할 수 있다고 말하는 듯 보인다. 그는 상실 또한 삶을 바로 세울 수 있다고 말한다. "무덤이 푹 꺼진 곳"은 빈 곳이 아니라 오히려 삶을 바로 잡는 기둥이며, 상실이 "푸른 해같이 죽음의 중심을 잡아주"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열심히 무덤을 바라보았다"는 문장처럼 그는 상실을 직시함으로써 완수되는 시의 세계에 관해서 말한다. '블랙홀'이나 '침묵'이나 소주병을 세는 친구의 몸짓 같은 것, 그것은 일상적 언어로 말하면 그리움이다. 이러한 그리움을 통해서도 장소는 다시금 발견된다는 믿음, 이것이 김영산 시인이 지닌 사유의 완력이라고 볼 수 있다. 현실에서 상실한 고향을, 그는 역설적 사유를 통해 재건하는 셈이다. (p. 시 130-131/ 론 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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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시』 2020-7월호 <이달의 시인/ 신작시/ 작품론>에서
* 김영산/ 1990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시집 『冬至』 『하얀 별』 등
* 박동억/ 문학평론가, 2016년 중앙신인문학상 평론 부문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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