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안희연
태어난 지 열흘도 채 되지 않은 흰 강아지가
그물에 갇혀 있는 장면이 떠올랐다
우리는 분명 행복에 대해 말하고 있었는데
방금 전까지 깔깔깔 소리 내어 웃기까지 했는데
살아 있어서 울고 있었다
짐승만이 낼 수 있는 소리였다
머리로는 구조대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으로는 그물의 색을 상상하게 된다
에메랄드색의 영롱함, 감귤색의 다정함 같은,
나는 다시 행복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한다
사과를 가득 싣고 해안 도로를 달리는 트럭
운전사가 넋을 잃고 오른편의 바다를 바라보는 동안
트럭에선 사과가 하나둘씩 쏟아지고
뒤따라오던 차들이 포물선을 그리며 충돌하고
아수라장이 된 도로 위
덩그러니 서 있는 내가 있다
아니라고! 이게 아니라고!
온 우주가 나의 행복을 망치려 든다
꽃다발을 들고 걸으면 무덤가에 도착해 있고
갓난아이의 정수리 냄새를 상상하며 눈을 뜨면
새하얀, 너무도 새하얀 방 안이다
물 한 컵을 벌컥벌컥 마시고
기억할게,라고 말한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무엇을 위한 말인지는 모른다
그럼에도 최선을 다해 행복을 말하는 것
어느 밤 대문 앞에는 흰 강아지가 새근새근 잠들어 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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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시』 2020-7월호 <신작특집 / 근작선>에서
* 안희연/ 2012년 『창비신인시인상』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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