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 시간 밖에서
최정례
수업 시작하자마자 물리 선생은 교실에 있던 화병 두 개를 내게 주면서 물을 갈아주라고 했다. 나는 이끼 낀 화병을 들고 나와 수돗가에 놓고 반항심이 생겨 곧바로 교실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지난번 시험엔 내가 최고의 점수를 받았는데 나한테 이럴 수 있나 생각하면서 교정 여기저기를 배회하고 있었다. 교정의 돌담 틈에는 화병에 꽂을 싱싱한 난초 같은 것들이 얼마든지 있었다. 물리 선생은 돌아오지 않는 나를 걱정하며 수업을 진행하리라. 할 테면 하라지 늘 자기들끼리 돌아가던 것이었으니까 그런 심정 속에서 어쩌다가 장면이 바뀌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결혼 전의 신랑과 부모님 옆방에 있었다. 서로의 몸을 만지다 완전히 옷을 벗고 있었다. 이러지 말고 저 이불 속으로 들어가자 곧 결혼할 것이니 부모님도 이해하시겠지. 그러나 천정의 불이 너무 환했다. 불을 끄면 하나가 켜지고 끄면 또 하나가 켜지고 세 개의 불이 번갈아 켜지자 벌떡 일어나 코드를 빼버렸다. 시간이 없다 시간이 없다니까 그러는 사이 그의 어깨는 침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는데 왜 그러냐고 묻자 알러지가 있어 가렵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이해하지만 벗은 몸이 머쓱했고 결혼이라는 것이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것인지는 나중에 나중에 이 꿈을 다 깨고 나서야 했던 것 같다. 어쨌든 나는 후회하기 시작했다. 물리 교실로 돌아가야 하는데 몇 호실인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교과서도 없고 교실 위치를 적은 시간표도 제대로 챙기지 않은 나를 탓하고 있었다. 한쪽 손에는 물을 갈아준 유리 꽃병 하나만 있었고 수돗가로 가니 내가 놓아둔 또 하나의 꽃병 대신에 누군가 컵에 싱싱한 꽃나무 줄기를 띄워 놓았는데 교실로 돌아가려면 난 그걸 훔치는 수밖에 없었고 어쨌든 나는 두 손에 꽃병을 들고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교실로는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결혼이라는 것은 너무나 많은 시간이 흘러 버린 후에나 알게 되는 것이고, 이름도 생각 안 나는 그 물리 선생 때문에 내 인생을 다 망친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 수십 년을 살아 놓고는 이제 와서 다시 살 수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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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에스프리』 2020-여름호 <신작 시>에서
* 최정례/ 199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개천은 용의 홈타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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