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대나무/ 정순영

검지 정숙자 2020. 7. 31. 01:39

 

 

    대나무

 

    정순영

 

 

  생겨날 때부터 대나무는 속을 비워야 산다는 것을 알았다.

  속을 비울수록 울림이 크다는 것도 알았다.

 

  대나무는 숲을 이루어

  바람의 집이 되어주기도 하고

  가난한 동박새들의 보금자리가 되어주기도 하고

  애처로운 그믐달의 안락한 쉼터가 되어주기도 한다.

 

  아랫마을 선비들은

  곳간이 비었어도 낡은 도포자락 속에 큰 울림을 겸손으로 가리고

  불의에 휘둘리지 않았다.

  청렴으로 쪼개지는 날까지 의리를 곧게 지키며 살았다.

 

  대나무가 문발로 엮여

  햇볕이나 소통을 가리는 것은

  아비 된 선비의 노릇을 말하는 것이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대나무처럼 속을 비워야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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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에스프리』 2020-여름호 <신작시>에서

  * 정순영/ 1974 『풀과 별』로 등단, 시집 『사랑』 등 다수, 시론집 『존재와 시간의 메타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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