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최하연
눌러도 소리가 나지 않는 건반을 책상 위에 그려놓고, 가만 귀 기울이고 있어요. 당신의 소원은 검은건반에서 뛰어내리는 것, 그리하여 일생일대의 화음으로 나를 부활시키는 것, 당신의 경전마다 엉터리 활자를 찍어놓고, 페이지를 봉인하고 있어요, 나는 나의 다음 페이지가 무조건 될 수 없다는 것, 우주를 한 바퀴 돌아 신발을 벗으며 '그것 참'이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당신이 떨어지고 있는 바로 그 순간, 나도 당신이 있던 그곳을 향해 뛰어오를 수 있다면, 당신의 멈칫함이 나를 일깨우는 바로 그 주문이길, 두들겨라, 두들겨라, (나의 건반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어요) 나의, 나를 위한 마침표는, 언제나 나의 시작 전에 찍히고 있어요, 도돌이표 마디마다 당신은 돌아오고 있겠지요, 가로지르는 모든 것들로 하여금, 당신을 향한 나의 좌표를 잃게 만들고 싶어요, 당신은, 또다시 그 높은 절벽, 검은건반에 올라서서 눈을 감고 있네요,
-전문, 『피아노』( 2007, 문학과지성사)
▶ 이성 너머의 조각난 사유들/ -최하연의 시세계(발췌)_ 고광식/ 시인, 문학평론가
소리로 점화해도 기억이 반응하지 않는다. 기억이 조각나고 잘게 부서져 경험의 시공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경험의 배경이 되었던 것들을 원래대로 복기해냈을 때, 과거는 현재의 부름에 호응한다. 지금 여기에서 화자는 "눌러도 소리가 나지 않는 건반을 책상 위에 그려놓고, 가만히 귀 기울이고" 있다. 과거의 내가 기억의 그물에 온전히 걸려 현재의 내가 되어야 한다. 당시 그곳의 배경이 되었던 것을 놓치지 않고 건져 올려야 한다. 그렇게 사라졌던 기억의 조각을 불러오면 "일생일대의 화음으로 나를 부활시키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다. 내가 부활하기 위해서는 나를 철저히 비껴갔던 기억의 조각이 하나의 형상으로 드러나야 한다. 과거의 조각을 맞춰 하나의 그림을 완성해야 잃어버린 나를 찾아 성찰할 수 있다. 때로는 조각난 기억 때문에 고통이 증폭되어 행위를 멈추기도 한다. 그러나 행위 중지를 선언하면 "나는 나의 다음 페이지가 무조건 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 된다. 시적 화자는 건반을 두드리며 당신으로 가는 길을 연다. 그곳에 당신과 나는 기억으로 하나의 세계를 완성한다. (p. 22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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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가』 2020-여름호 <계절비평>에서
* 고광식/ 1990년 『민족과문학』으로 시 부문 & 2014년 ⟪서울신문⟫으로 문학평론 부문 등단, 시집 『외계 행성 사과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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