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공
박경림
나는 허공을 데리고 걷는 습관이 있네
내가 외출하려고 하면 허공이 나보다 먼저 나서서
길을 재촉했네
소음들로 빽빽대는
도시의 거리를 쏘다니거나
의자에 앉아 슬쩍 딴전을 피울 때도
허공은 눈앞에서 아른아른
떨어지지 않았네
내가 급히 걸을 떄나 느릿느릿 걸을 때나
그는 언제나 나의 앞에서 걸었네
때로 그는 내 머리 속을 빙빙 돌며
나의 심기를 어지럽혔네
친구를 만나 몇 시간씩 수다를 떨 때도
죽은 듯 옆 자리에 앉아 재촉하지 않는
그의 속을
아무래도 나는 알 수가 없네
그러나 그는 나를 억지로 붙잡고 늘어지지 않네
우리는 속내를 터놓고 이야기를 나눠 본 적도 없지만
시비를 걸며 엎어지고 깨져 본 적도 없네
때로 헛것이 보여
술잔을 들었다 놓았다
붉으락푸르락 안면을 바꿔도
그는 그저 떠나지 않았네
그와 나 해물파전 사이를 겉돌며
취한 술 사발 속을 건너다닐 때
나는 그의 옆자리에 그의 허공이
우두커니 앉아 있는 것을 보았네
그러나 나는 자주 그를 껴안고 뒹굴거린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네
-전문-
▶ 사람의 방식과 시적 가치에 대한 재인식/ -박경림의 시세계(발췌)_ 백인덕/ 문학평론가
인용 작품은 '맹목'과 '기웃거림' 사이에서 오래 눈길이 머무는 시인의 사랑의 방식과 시작 태도를 여실히 함축하고 있다. '허공'은 시인에게 두 가지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하고 답하면서 시적 가치를 형성한다. 하나는 1연의 "나는 허공을 데리고 걷는 습관이 있네/ 내가 외출하려고 하면 허공이 나보다 먼저 나서서/ 길을 재촉하네"에서 드러나듯 시인의 외부 대상인가 하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눈앞에서 아른아른/ 떨어지지 않는" 또는 " 해물파전 사이"나 "취한 술 사발 속" 같은 사이, 거리의 문제다. 즉 허공이 나의 오롯한 투사일 수도 없지만 완전한 타자일 수도 없다는 것이 시인의 사랑의 방식을 개성적으로 만들면서 동시에 해결할 수 없는 방향으로 문제를 심화한다. (p. 시 138-139/ 론 155-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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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가』 2020-여름호 <시인해부/ 근작시/ 평론>에서
* 박경림/ 1995년 『한국시』로 등단, 시집 『3년 후에도 그리워진다』 『푸카키 호수의 침묵』, 에세이집 『아름다운 오해와 슬픈 이해』
* 백인덕/ 1991년『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잠적의 우주』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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