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등의 주소를 적겠습니다
이혜미
지우고 덮어도 계속해서 스며나오는 것들이 있어요 오늘은 밤의 공터를 오래 걸어 옛집을 찾아갔어요 기억하시죠 그 망할, 아니 이미 망해버린 그 집을
이런 걸 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저 작은 구덩이였던
주소를 가진다는 건 뭘까요 마음대로 운용할 수 있는 개인적인 어둠을 가졌다는 건······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에요 밤은 감당할 만한 밀도만을 허락하잖아요 우릴 받아주는 공간은 오늘 만들어낸 발자국뿐인데도
걸을 때마다 조금씩 더 추워집니다
아시잖아요
발자국에는 천장이 없으니까요
눈을 감으면 입체적인 사람이 된 기분입니다 옛집의 창가에 잠겨 오래전에 죽은 가수의 노랫말을 되뇌이면 어수선한 별자리들이 밤의 안쪽까지 차오릅니다 멀리서 훔치기 좋은 집들이 걷고 있습니다 망할, 망해버릴, 제각기의 주소들입니다 몸속이 처음 본 공터처럼 넓어질 때 눈앞에서 가로등이 켜졌고 마침표들이 굴러와 가장 낮은 자리에 고였습니다
보내는 이 란에는 잃어버린 지붕 대신 가로등의 주소를 적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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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와사람』 2020-여름호 <시와사람 초대석>에서
* 이혜미/ 2006년 ⟪중앙일보⟫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시집 『보라의 바깥』 『뜻밖의 바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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