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오민석_세계를 관통하는 문...(발췌)/ 후회라는 그 길고 슬픈 말 : 고영

검지 정숙자 2020. 7. 6. 03:20

 

 

    후회라는 그 길고 슬픈 말

 

    고영

 

 

  아무 거리낌 없이

  강물에 내려앉는 눈발을 맹목적이라고 허공에 쓴다

 

  아픈 기억들을 불러내어 물 위에 놓아주는 강가

  무늬도 없는 저녁이 가슴을 친다

  하류로 떠밀려 간 새들의 귀환을 기다리기엔

  저 맹목적인 눈발들이 너무 가엾고

  내겐 불러야 할 간절한 이름들이

  너무 많다

 

  강물에 내려앉은 눈이 다 녹기 전에

  아픈 시선 위에 아픈 시선이 쌓이기 전에

  바람이 다 불기 전에

  상처가 상처를 낳기 전에

 

  너라는 말

  자기라는 말

  누구누구의 엄마라는 말

  당신이라는 말

  미안하다는 말

 

  모두 돌려보내자 원래의 자리로 돌려보내자

 

  속수무책 쏟아지는 저 눈이 녹아

  누군가의 눈물이 되기 전에

  다시 하늘로 돌려보내자

 

  후회라는 그 길고 슬픈 말을 배우기 전에

    -전문-

 

 

  세계를 관통하는 문법을 찾아서(발췌) _ 오민석/ 시인, 문학평론가

  이 시는 '자연물/의식'의 이항 대립으로 이루어져 있다. 자연물은 '물자체(thing itself)'이므로 그 자체의 속성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것은 인식(혹은 의식)의 주관성과 관계없이 스스로 존재한다. 이 시에서 자연물은 "눈"이다. 눈은 자체의 원리에 의해 스스로 내릴 뿐, 그 자체로 보면 '의식'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 화자가 "눈발"을 "맹목적"이라고 하거나 "속수무책 쏟아"진다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이런 자연물에 대립하는 것이 화자의 '의식'이다. 훗설(F. Husserl)의 현상학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모든 의식은 무엇에 '대한' 의식이다. 의식은 이런 '지향성'을 가지고 있다. 이 시의 '구조'는 주체의 주관성으로부터 독립된 '자연물'을 '의식'이 건드리는 이야기이다. 눈은 인간의 의식과 아무런 관계없이 그냥 내릴 뿐이다. 그것을 향한 화자의 의식은 "가엾고", "간절한", "아픈", "상처", "너", "자기", "미안하다는 말" 등의 기표들을 동원하여 그것에 수많은 '의미'들을 부여한다. 이것이 바로 지향성을 가진 의식이 사물을 대하는 방식이다. 화자는 의식이 자연물에 행하는 이런 식의 의미부여 행위가 "누군가의 눈물"이 될까 봐, 그리하여 "후회라는 그 길고 슬픈 말을 배"울까 봐, 자신의 '의식'으로부터 '자연물'을 원래의 자리로 돌려보내자고 한다. "모두 돌려보내자 원래의 자리로 돌려보내자"는 독백은, '자연물'과 '의식'을 각자의 자리로 되돌림으로써 더 큰 '슬픔'의 도래를 방지하려는 화자의 내면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이렇게 '자연물/의식'이라는 이항 대립물 사이의 팽팽한 긴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이 시의 이항 대립을 '다가감/물러섬'으로 읽어낼 수도 있다. 이 시가 의식이 자연물에 다가가고, 그 다가감을 다시 철회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p. 시 225-226/ 론 226-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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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인동네』 2020-7월호 <비평의 실제/ 3. 구조주의로 시 읽기>에서

   * 오민석/ 충남 공주 출생, 시인, 평론가, 1990년 『한길문학』신인상으로 등단, 1993년《동아일보》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시집『굿모닝 에브리원』『기차는 오늘 밤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다』등, 문학이론서『현대문학이론의 길잡이』『정치적 비평의 미래를 위하여』, 문학연구서『저항의 방식: 캐나다 현대 원주민 문학의 지평』, 송해 평전『나는 딴따라다』『밥 딜런, 그의 나라에는 누가 사는가』, 시 해설집『아침 시: 나를 깨우는 매일 오 분』, 에세이집『개기는 인생도 괜찮다』, 번역서 바스코 포파 시집『절름발이 늑대에게 경의를』등, 現 단국대 영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