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임지훈_불화 : 인간적인, 너무나...(발췌)/ 유리 게임 : 이영주

검지 정숙자 2020. 7. 6. 02:21

 

 

    유리 게임

 

    이영주

 

 

  너는 너를 잃어버렸다 밤마다 누가 그렇게 비명을 지르니? 너는 잃어버린 너에게 물었다 초고층 아파트 안에서는 유리들이 그렇게 해 긴 손자국을 남기며 창문 밖으로 나가는 네가 돌아보다 말고 대답했다 너는 어른이지만 유리처럼 울 수 있다면 좋겠어 빡빡 세계가 그어지는 소리처럼

 

  너는 너를 잃어버리고 투명한 바닥에서 내내 서성거렸다 어디로 도망가야 하지? 이제 대답해줄 네가 없그나 너는 보이지 않는 송곳으로 그어놓은 유리창을 만졌다 도망칠 데가 없어 안쪽도 바깥쪽도 방향이 없어 감염된 네가 입김을 불었다 혼잣말을 했다 사실 잃어버릴 필요도 없는 거야 사방에 네가 있거든

 

  너는 너무 많은 얼굴을 씻고 붉은 가운을 걸쳤다 밤의 모든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유리는 상처가 나도 깨지지 않아 유리가 깨질 때는 모든 것이 완벽하게 부서질 때지 너는 빡빡 울 수 있는 곳으로 가려고 했다 사방에서 침묵이 가득 찬 비명이 들렸다 괜찮아 너는 이곳에서 언제든 추락할 수 있어

   -전문-

 

 

  불화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발췌) _ 임지훈/ 문학평론가

  눈물 대신 비명이 놓여 있는 세계인 「유리 게임」에서, '너'는 유리와 투명한 바닥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이 세계가 유리에 비친 환상일 따름이고, 그 이면에 놓인 것이 헐떡이며 붉은 피를 흘리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삶의 방침은 그 유리를 깨고 나가 '진짜 세계'를 마주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시에서 강조되듯이, 우리는 서성거릴 뿐,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습니다. 이 시에서 유리 너머에 대해서는 아무런 묘사도 주어져 있지 않은 것처럼, 유리창 너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화자는 "도망칠 데가 없어 안쪽도 바깥쪽도 방향이 없어"라며 이 세계의 진실을 속삭입니다. 더욱 절망적인 것은 '너'가 잃어버렸다고 믿었던 '너' 자신마저, 사실은 사방 어디에나 있는 이미지에 불과했다는 점이겠지요. 그러니 '너'는 아침이 밝아 "빛이 쏟아져 들어"올 때, 다시금 '붉은' 옷을 걸칩니다. "침묵이 가득 찬 비명" 속에서, "빡빡 울 수 있는 곳으로" 가기를 희망하면서 다시금 '알 수 없는 마음'을 감춥니다.

  바깥도, 방향도, 심지어는 숨을 수 있는 장소나 도망칠 수 있는 장소조차 부재하는 이 폐쇄적인 세계 속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오직 '알 수 없는 마음'을 감추는 일뿐이라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그건 우리가 우리의 겉모습을 벗어던지고 내면과 소통하고자 할 때 진실한 자기를 만나게 되리라는 뉴에이지적인 가르침마저도 사실은 그저 수많은 이미지 가운데 하나일 뿐이고, 그것 또한 또 하나의 '붉은 옷'에 불과할 뿐이라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진정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조차도 사실은 스스로를 속이기 위한 마취약에 다름없는 셈입니다. 이토록 폐쇄적인 세계 속에서 단 하나의 위안이 있다면 그건 우리가 "언제든 추락할 수 있"다는 것뿐입니다. 오직 그것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의미에서의 위안이 되어주는 세계가 이영주가 바라보는 현실의 모습인 셈입니다. (p. 시 26/ 론 3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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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인동네』 2020-7월호 <특집/ 신작시/ 작품론>에서

  * 이영주/ 1974년 서울 출생, 2000년 『문학동네』로 등단, 시집 『108번째 사내』 『차가운 사탕들』  『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 등

  * 임지훈/ 2020년 ⟪서울신문⟫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평론 부문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