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첫눈입니까
이규리
누구인가 스쳐 지날 때 닿는 희미한 눈빛, 더듬어보지만 멈칫하는 사이 이내 사라지는 마음이란 것도 부질없는 것 우린 부질없는 것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친 일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낱낱이 드러나는 민낯을 어쩌지 못했을 것이다 생각날 듯 말 듯 생각나지 않아 지날 수 있었다 아니라면 모르는 사람을 붙들고 더욱 부질없어질 뻔하였다 흩날리는 부질없음을 두고 누구는 첫눈이라 하고 누구는 첫눈 아니라며 다시 더듬어보는 허공, 당신은 첫눈입니까
오래 참아서 뼈가 다 부서진 말
누군가 어렵게 꺼낸다
끝까지 간 것의 모습은 희고 또 희다
종내 글썽이는 마음아 너는,
슬픔을 슬픔이라 할 수 없어
어제를 먼 곳이라 할 수 없어
더구나 허무를 허무라 할 수 없어
첫눈이었고
햇살을 우울이라 할 때도
구름을 오해라 해야 할 때도
그리고 어둠을 어둡지 않다 말할 때도
첫눈이었다
그걸 뭉쳐 고이 방안에 두었던 적이 있다
우리는 허공이라는 걸 가지고 싶었으니까
유일하게 허락된 의미였으니까
저기 풀풀 날리는 공중은 형식을 갖지 않았으니
당신은 첫눈입니까
-전문-
▶'글썽이는 마음'이 허공에 풀풀 날리다(발췌) _ 호병탁/ 시인
시간은 하나의 일관된 흐름으로 표상되지만 그것은 객관적 실재라기보다는 경험적 현상으로 인지되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의 시간을 기억하고 의식할 수 있지만 미래는 절대 그럴 수 없다. 화자는 첫눈 내리는 허공을 보며 과거의 시간을 더듬어 본다. 그 때는 "슬픔을 슬픔이라 할 수"도 없었고 "어제를 먼 곳이라 할 수"도 없었고 "더구나 허무를 허무라 할 수"도 없었다. 당시는 사랑에 빠져있어 미처 몰랐던 것인가. 그러나 이제 허공을 보며 기억을 더듬으니 실상 '당신'과 나의 관계는 '슬픔'이었고 '먼 일'이었고 '허무'였다. 지금 화자의 감정과 의식은 '첫눈'에 투사되어 있다. 즉 화자와 첫눈은 '공감(empathy)' 상태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첫눈은 바로 이런 슬프고 허무한 마음의 표상이 되고 있다./ 여기서 "허무를 허무라 할 수 없어"라는 말 앞에 "더구나"라는 부사를 견인해 '허무'를 특별히 강조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허무'는 무가치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져 매우 허전하고 쓸쓸함을 느낄 때 쓰는 어휘다. 한마디로 '덧없음'이란 말에 다름 아니고 이는 즉시 첫 연의 '부질없음'과 맥을 같이한다. 시인이 왜 "부질없는 것", "부질없어질 뻔", "부질없음"의 형식으로 이 말을 세 번이나 반복했는지 이해가 된다./ 화자는 다음 넷째 연에서도 첫눈의 마음, 즉 자신의 마음을 읽고 있다. 그런데 셋째 연의 세 행 모두가 "할 수 없어"라는 부정의 종지형인 반면 이번에는 세 행 모두가 "할 때도"라는 긍정의 종지형을 반복하고 있다. 시적 의미구성의 변화와 리듬의 효과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p. 시 61-62/ 론 6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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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당문학』 2020-하반기호 <이규리 소시집/ 해설>에서
* 이규리/ 1994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앤디 워홀의 생각』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등, 산문집 『시의 인기척』 등
* 호병탁/ 충남 부여 출생, 시집 『칠산주막』, 평론집 『나비의 궤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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