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보라
안영희
새로 넘긴 캘린더엔 연둣빛 새싹들이 돋아나고 내일이 개구리가 동면을 끝내고 나온다는 경칩이라는데, 저물녘 내 서재의 통유리 창밖에는 돌연 세상을 하얗게 휘덮으며 눈이 내리고 있다. 선뜻 지나가는 폼새가 아니고, 그 촘촘하고 무성하기가 흡사 한겨울을 뺨치고 있다.
나는 금세 주방으로 가, 더운 차 한 잔을 만들어 두 손으로 싸안는다.
이렇게 갑자기 흰 눈이 지천이던 날, 전화해야 할 사람이 있으니 하던 통화를 끊자 하던, 어느 해 전의 한 여자의 어처구니처럼, 많은 사람들은 방금 전까지 속해 있던 현실을 떨치고 나와, 순식간에 열어주는 몽환의 풍경화 속으로 환상여행이라도 떠나고 있을까?
내개도 저리 아득히 쏟아지는 눈을 배경으로 한, 조금은 아름다웠을 낭만의 기억이 감아 온 생의 어느 갈피쯤엔 하나 끼어 있기도 하련마는, 웬일일까? 애틋한 그런 유의 감상들 다 젖히고 유독 선연하게도 다가오는 장면은, 눈 못 뜨게 몰아치는 눈보라 속 울부짖는 갈대들의 황룡강변을 가던, 열댓 살 즈음의 한겨울 날인 것은.
바로 이맘때쯤이었을 거다.
아마도 고모 집에서 봄방학을 지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던 듯한데, 마을을 벗어난 지 벌써 오래인, 망망히 펼쳐진 들판을 젖히며 줄곧 한 줄기로 이어지는 강변길을 가고 있었다. 학생복 외엔 더는 아무것도 덧입은 것 없이 사선으로 기습하는 눈보라에 온몸을 갈대밭처럼 뜯기면서.
그 끝날 것 같지 않게 이어지던 폭설의 봇둑 한가운데쯤에서였다. 줄이 되어 내 앞을 가시던 한 할아버지가 갑자기 걸음을 돌리시더니, 자신의 두루마기 속 무명목도리를 빼내어, 사시나무로 떠는 내 목에다가 둘러 묶어 주는 것이었다. 무차별로 얼굴을 때리는 눈발 속에서 말씀이라곤 한마디도 없이.
그분은 마을을 나설 때부터 어슷하게 출발했던 듯한, 바로 아랫잡에 사시는 고모네의 친척이셨고 손이 그리 귀했던 고모 댁과는 달리, 여러 아들들에 너무 많다 싶은 손자들을 두고 계셨으나, 집이 겨우 듬성한 싸리 울타리 한 장 건너일 뿐인데도, 이상하게도 말소리를 거의 들어 보지 못했던 할아버지였다.
그 모진 강바람에 날아갈 듯 가련했던 그 소녀가 자라 머리카락이 세어 가는 세월의 뒤에서도, 몰아치던 눈보라 속을 혼신으로 디뎌 가던 절망의 보행과 함께, 무심한 듯 베풀어 주던 촌부村夫의 체온 묻은 따스한 온정 하나를, 이리도 생생하게 데려오고 있는 연유는 무엇인가?
전후의 부친 부재인 내 성장기. 그 위해의 세상에 눈보라 덮쳐도, 바바람이 기습해도 한 장 교복 외엔 어린 몸을 보호해 줄 누구도 아무것도 더는 갖지 못했으므로, 응석이라고는 부려본 적 없이 자란 나는, 돌아보면 개 같은 시대가 유기한, 한 그루 애처로운 겨울나무였다.
운전대를 잡고 있을 때마다 틀어놓는 FM방송에서 들은 적이 있다.
가방만 보면, 구체적인 목적이라거나 계획도 없이, 병적으로 사대는 어떤 여자의 얘기를. 그렇게 사고 또 사들인 가방이 장롱 속을 넘쳐나, 더 이상은 가족에게 안 들킬 방법이 떠오르지 않자, 여자는 그 넘쳐나는 가방들 앞에서 망연히 생각했다는 것이다.
나는 왜 이렇게 가방을 사는가? 왜 무턱대고 가방만 보면 사고 싶은가를. 그리고 골똘한 물음 끝에 유추해 냈다는 것이다.
-아, 나는 떠나고 싶었었구나! 떠나고 싶을 때마다 가방을 샀었던 거로구나! 하고.
나에게도 한 가지 편집증세가 있다.
평소에 사람 많고 소란한 곳이 싫어서, 유행이나 새 물건에 대한 욕망에도 줄서지 않고 비교적 쉬이 지나치는 편인데, 이상하게도 목에다 감고, 두르는 숄 종류를 보면 특별히 설레 오는 충동을 느낀다. 보세상가, 인사동, 동대문 어디를 가리지 않고 그 증세는 발동하고, 외국여행 길에 오를 때에도 빠뜨리는 법이 없이, 그 나라 풍의 숄을 꼭 한 장은 사 들고 오는 버릇이 있다.
가을날 이스탄불 아침 사원 앞에서 산, 기다란 판초 모양의 숄로부터 시작해서 인도, 이란, 칠레, 네팔, 아프리카 할 것 없이, 그리하여 여행 동료들은 내가 끼지 않은 여행지를 돌다가 뭐 그럴싸한 숄을 볼라치면,
"안영희가 왔으면 이건 분명 안영희 건데." 했다고도 할 만큼.
그렇다면 유별난 내 편집의 무의식은, 어쩌면 보호벽 없이 견뎌온 성장기의 사무친 추위에서 비롯된 것이라, 설명되는 것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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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영희 시인의 산문집 『슬픔이 익다』에서/ 2020. 6. 15. <문예바다> 펴냄
* 안영희/ 전남 광주 출생, 1990년 시집 『멀어지는 것은 아름답다』로 등단, 시집 『그늘을 사는 법』 『내 마음의 습지』 등, 2005년 경인미술관에서 "흙과 불로 빚은 시" 도예개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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