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계약/ 길상호

검지 정숙자 2020. 6. 24. 15:49

 

 

    계약

 

    길상호

 

 

  이번엔 반신불수의 집을 택했습니다

  고양이 셋을 매달고 다니는 사람에게는

  이런 집 말고 소개할 곳이 없다고

  부동산중개업자들이 한목소리로 말하더군요

  한쪽 방은 죽어 싸늘하고 딱딱하고

  다른 방도 오래 앓아 수척해진 상태였는데

  균열과 곰팡이와 결로가 뒤섞인 벽,

  그 몹쓸 쓸쓸함에 발목 잡히고 말았습니다

  집은 전체적으로 낡고 늙었지만

  어쨌든 부드러운 인상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죽은 방과 아픈 방을 건너다니다 보면

  기막힌 이야기가 태어날지도 모르지,

  막연한 기대를 갖게 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생각해보면 내 마음이 세 들어 살던 당신도

  상처투성이 집이었습니다

  수리해 놓으면 또 다른 상처를 만들어내는

  그 집이 그래도 편안했던 건

  어떤 울음에도 소홀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고양이들은 이번 집에서도 야옹 야옹

  벽마다 근사한 무늬를 그리며 잘 지낼 겁니다

  사람의 집념쯤이야 훌쩍 뛰어넘을 수 있는

  점프 능력을 갖추고 있으니까요

  이제 계약은끝났으니 다음 소식은

  이사를 한 후에 천천히 적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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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간 『시마詩魔』 제4호 2020. 06. <시마詩魔_여름 신작시>에서

   * 길상호/ 200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오동나무 안에 잠들다』 『오늘의 이야기는 끝이 났어요 내일 이야기는 내일 하기로 해요』 등. 사진 에세이 『한 사람을 건너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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