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량한 하루
김화순
불량한 하루예요 날이 저물듯 기념일은 돌아오고 해가 뜨듯 국경일이 와요 일요일은 못 본 책처럼 책장에 쌓여가요 나는 두꺼워진 얼굴을 벗고 잠자리에 들어요 도시의 별들은 제 빛을 잃고 달빛처럼 창백해요 베란다에 버려진 결단은 앙파처럼 썩어가고 설거지통에는 하루치의 연민이 쌓여 있어요
불온한 사랑이에요 상상력이 멈추면 속이 훤히 보이거든요 사랑을 찾는 것만큼 슬픈 일은 없을 거예요 사랑을 알게 될 즈음 우린 헤어져 건너편 별로 건너가지요 그래도 월요일은 오고 꿈은 쌓여가요 재활용 함에 쑤셔 넣은 사랑을 다시 입을 수 있을까요 신념은 서랍 속에서 조금씩 무너져요 시간은 용병처럼 힘차게 걸어가고 나는 점점 다리에 힘이 빠져요 아침을 깨우는 비둘기 울음은 광고의 배경음처럼 익숙해요
불량한 하루예요 길 가다 영화관에 들러 무뚝뚝한 영화를 보고 팸플릿을 챙겨요 오늘도 내 귀는 종일 사소하고 밋밋한 것들을 모아요 지나치는 것의 등을 힐끗, 바라보는 나날들 오늘도 나는 오른쪽으로 기울어요 내 안 재미없는 과거를 세고 있는 문장들 내일을 아는 하루가 태양 아래 반짝여요 그래도 아침은 오고 어제는 절뚝이며 걸어가지요
-전문-
해설> 한 문장: 여기서 시인이 노래하는 "불량한 하루"는 우리가 매일매일 겪는 무심한 일상의 명명이자, 어쩌면 그렇게 하릴없이 흘러가는 인생 전체를 환유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하루"는, 해가 뜨고 날이 저물듯이, 기념일처럼 국경일처럼 일요일처럼 찾아온다. 채 읽지 못한 책처럼 쌓여가는 미완의 형식으로 "불량한 하루"는 두꺼워진 얼굴을 하고 다음날로 이월해 갈 뿐이다. 창백해진 결단과 연민이 그 위로 쌓여 간다. 하지만 시인은 여전히 "불온한 사랑"을 꿈꾼다. 꿈과 상상이 멈추면 불온성은 속을 환히 드런낸 채 소멸하는데, 사랑을 찾는 것만큼 슬픈 일은 없지만 그래도 월요일처럼 찾아오는 시간 속에서 꿈과 상상은 소중하게 쌓여 간다. "불온한 사랑"은 "불량한 하루" 가운데 가장 빛나는 예외적 순간이었던 셈이다. 그 순간은 용병처럼 힘차게 걸어가고 비둘기 울음처럼 새로운 아침을 깨운다. 온종일 사소하고 무뚝뚝하고 밋밋한 순간을 담아내던 "문장들"은 이제 "내일을 아는 하루가 태양 아래" 찾아와 반짝인다는 것을 노래해 갈 것이다. (p. 시 82-82 / 론 119-120) (유성호/ 문학평론가, 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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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구름출판사』에서/ 2020. 6. 12. <시작> 펴냄
* 김화순/ 서울 출생, 2004년 『시와정신』으로 등단, 시집 『사랑은 바닥을 쳤다』 『시간의 푸른 독』, 저서 『김종삼 시 연구』 『현실 체험시의 이론과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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