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향수첩
남진우
종말을 기다리며
나는 폐허가 되어버린 정거장에서 마지막 기차를 기다리고 있다
검은 가방을 든 사내들이 내 앞을 지나가고
구름 같은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휴가 나온 병사들이 지나가고
가석방된 죄수들이 묵묵히 지나가고 손을 맞잡은 십대 소녀들이 재잘거림을 흩뿌리며 지나간다
종말을 기다리며
나는 오지 않는 기차를 기다리고 있다
건너편 신문 가판대를 지키는 할머니만이 가끔씩 나를 쳐다볼 뿐
비 한 방울 내려주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하늘은 내 앞에서 유유히 흘러간다
녹슨 스피커에서 가끔씩 윙윙거리는 소리가 울려퍼지다 그치고
정거장 옆 황량한 공터에서 불어온 바람이 모래먼지를 끼얹고 간다
종말을 기다리며
기다리는 것은 이것이 정말 마지막이라고 거듭 다짐하며
나는 기차가 서지 않는 역 퇴색한 플랫폼 벤치에 앉아 있다
일감이 떨어진 늙은 재화공처럼 망연히 제 신발을 굽어다보며 한없이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을 견디고 있다
아이 하나 승강장에 발을 대롱거리며 앉아 있지만 누구 하나 상관하지 않는다
전쟁과 혁명의 시절을 지나 정부군과 반군이 번갈아 이 역을 점령했고
하늘에서 비행기가 공습을 하는 동안 멀리 해안에선 함포사격 소리가 메아리쳤다
종말을 기다리며
평생 배급을 기다리듯 인생을 살 순 없는 것이라고 중얼거리며
나는 보수 중인 낡은 호텔 구석진 방 침대에 누워 있는 나를 상상한다
한때는 유명했던 이 역을 거쳐간 숱한 왕과 총통과 수상과 여배우의 얼굴을 떠올린다
가끔 이곳에 쉬지 않는 기차만이 굉음을 울리며 스쳐가는 역에서
나는 초조하게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헛기침을 하며
아직도 지평선 저쳔 먼 곳에서 이 역을 향해 한없이 천천히 오고 있는 기차를 기다린다
요란한 기적소리도 없이 환영의 팡파레도 없이
그 기차는 마침내 올 것이고 나는 그 기차에 올라탄 유일한 승객이 될 것이다
종말을 기다리며
나는 폐허가 되어버린 정거장에서 상연되는 마지막 영화를 지켜보고 있다
무대 중앙을 가르고 객석을 향해 돌진할 기차가 느리게 아주 느리게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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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사사』2020-봄호 <신작특집>에서
* 남진우/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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