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향 주유소
강빛나
가야 할 곳과 가고 싶은 곳이 다른 곳에서
내 것이 아니어도 퍼 줄 것이 있다면
오늘도 일어나자마자 사거리 주유소로 직진을 하죠 새벽 눈을 비비며 미터기 호스에, 내 스물여섯 살의 힘줄을 꽂고 원하는 만큼 거리를 넣어주면요, 허기 면한 바퀴들이 떠날 준비를 해요
그녀를 만난 지 사백일
틈만 나면 동해로 떠나고 싶지만
언제나 대기, 기다림은 필수죠
가득요! 들어오는 차량 사이 불빛 같은 한마디를
기다리는 내 심장에도 가득 채우고 싶어요
가끔씩 가을볕을 받지 못한 팔목에서 하고 싶은 말이 돋아나고요
그녀의 손바닥과 내 손바닥이 마주할 최소한의 공간, 내게도 해야 할 것들이 쌓여가죠 그러나 언제부터 알아가는 지점에서 우리는 섞이지 않아요
울 아버지 바퀴를 내가 아니면 밀어줄 사람이 없고요 배보다 배꼽이 큰 병원비는 내 목덜미를 조여요 그래도 사과향을 담아 미터기에 연결하는 꿈을 꿔요 호스를 타고 가고 싶은 곳이 사과밭으로 떨어지고요 코밑에서 나던 그녀 머리 냄새가 탱탱하게 퍼져가요
가고 싶은 곳이 시도 때도 없이 고개를 내미는 주유소에서
그녀에게 줄 선물은 늘 나보다 크게 포장해요
처음부터 내 것이 없어서 갈수록 진도는 더디고요
저녁에는 가야 할 곳을 찾느라 피가 가렵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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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네르바』 2020-여름호 <신진 조명>에서
* 강빛나/ 2017년 『미네르바』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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