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별
박성현
햇빛이 들었다 내가 오래도록 죽었던 자리였다 몸을 감았던 거미들이 희미한 기척에도 놀라 떼 지어 물러났다 양철을 덧댄 지붕에 기어오르거나 밴 년 묵은 아카시아까지 끈적끈적한 줄을 뿌렸다 대못이 빠져나간 구멍처럼 거미는 흔적을 남겼다 별빛이 든 나도 내게서 천천히 물러났다 거미줄에서 죽은 자들의 냄새가 지독했다 나는 오래 전에 그들과 함께 웃었는데, 그날 너무 웃어서 눈 코 입이 구겨져버렸지, 기억하니? 상강이 지나고 언덕마다 별빛이 들었다 거미줄이 뒤엉킨 자리에도 얼음조각이 방울방울 성글었다 나는 내 거죽을 모조리 빠져나가다 말고 잠시 머물러 새로 돋는 땅의 기척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전문-
▶ 그 일은 오래전에 있었다(발췌) _ 이병국/ 시인, 문학평론가
존재가 온전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자신이 부재한 순간이다. 그 순간에 비로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존재 양태를 돌아보며 새로운 자리로 나아갈 수 있다. 서리가 내리는 늦가을, "상강이 지나고 언덕마다 별빛이" 든다. 별빛은 "내가 오래도록 죽었던 자리"에 비춘다.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거미들은 물러나지만 거미가 비껴난 자리가 비워지지 않는다. 오히려 "대못이 빠져나간 구멍처럼" 흔적이 남는다. 채웠던 것이 빠져나가면서 생긴, 있어야 할 것이 없는 부재의 흔적. 별빛을 받고 거미가 물러난 자리에서 '나'는 '나'를 인식하고 그로부터 물러날 수 있다. 그러나 이 물러남은 곧바로 새로운 터전으로 삶을 옮기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별빛은 '나'에게 그곳이 "죽은 자들의 냄새가 지독"하게 고여 있음을 폭로한다. 부재의 흔적은 언젠가 한 번 얼굴이 구겨지도록 웃었던 존재들과의 "오래전" 한 때를 상기시킨다. 더는 함께 할 수 없는 존재들에 대한 기억은 "얼음조각"처럼 성글어 있다. 이를 관계의 상실로 볼 수 없는 것은 오래전의 기억이 지금의 '나'로 이어지지만 그것을 죽여야지만 '나'는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것과 관련된 것들을 회상하는 것은 한 줌의 슬픔에 자신을 고착시키는 것일 수 있다. 이는 대체로 자기혐오로 전락할 위험에 놓인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은 말 그대로 돌이킬 수 없다. 하지만 그 돌이킬 수 없음 앞에서 머뭇거리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할 일은 아닐 것이다. '새로 돋는 땅의 기척을 감각하기 위해서라도 "잠시 머물러"야 한다. (p. 시 137 / 론 143-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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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시』 2020-5월호 <현대시가 선정한 이달의 시인/ 신작시/ 작품론>에서
* 박성현/ 2009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으로 등단, 시집 『유쾌한 회전목마의 서랍』
* 이병국/ 시인, 문학평론가, 201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시 부문 & 2017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평론 부문 당선, 시집 『이곳의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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