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인과관계가 명확한 것만 적습니다
이장욱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영원을 잃어버렸다.
자꾸 잃어버려서 믿음이 남아 있지 않았다.
원래 그것이 없었다는 단순한 사실을 떠올렸다.
나는 이제 달리지 않고 누워 있다.
원인이 사라진 풀밭에 자전거를 버려두었다.
바퀴의 은빛 살들이 빛나는 강변을 바라보았다.
서로에게 불가능해지는 일만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였다.
풀밭에는 아주 작은 생물들의 우주가 펼쳐져 있고
그것을 아는 것은 쉽다.
그것을 진실로 느끼는 것은 모로 누운 사람들뿐이지만
누구의 왕도 누구의 하인도 아니어서
외롭고 강한 사람들뿐이지만
은륜이 떠도는 풍경을 바라보면 알 수 있는 것
햇빛에도 인과관계가 있고 물의 일렁임에도 인과간계가 있고 달려가다가 멈추어 서서 잔인한 표정을 짓는 일에도 인과관계가 있겠지만
사람이라면 죽은 사람의 입술에만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의 손금에만
기도를 하지 않아서 좋았다.
나는 매일 나의 우주에서 부활하려고 했다.
거대한 존재가 내 곁에 모로 누워 있기라도 한 듯이
사랑을 하려고 했다
나는 명확한 것만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바라보는 사람이 보이지 않아서
텅 빈 주위를 둘러보았다.
-전문, 『현대시』, 2020-4월호
* '인과관계가 명확한 것만을 적습니다.' : 『인과관계가 명확한 것만을 적습니다 : 사망진단서 모음집』 , 김지현 편, 자연사 연구회, 2019.
▶ 우리는 이 잘못들을 끝내(발췌) _ 홍성희
"인과관계가 명확한 것만을 적습니다." 사망진단서의 양식은 다양하지만, 한국의 양식에는 대개 '사망의 원인'을 적는 칸이 네 개 있다. '(가) 직접 사인, (나) (가)의 원인(중간선행사인), (다) (나)의 원인(선행사인), (라) (다)의 원인.' 그리고 이 네 칸을 세로로 묶으며 다음 메시지가 쓰여 있다. '(나) (다) (라)에는 (가)와 직접 의학적 인과관계가 분명한 것만을 적습니다.' 이 칸을 채울 수 있는 '명확한' 것들이란, 이들 사이에 성립되어야 할 '직접적인 인과관계'란 무엇일까. 이 서류 위에 적힌 것들은 그 모든 '인과관계'의 최종 결과가 되어버린 한 사람의 마지막 순간들을 얼마나 '명확하게' 보여주고, 또 보여주지 못할 것인가. 우리는 언제나 무엇인가를 명확히 목격하고 바라보고 있다고 믿으며 그 무언가를 적어 내려갈 것이다. 그리고 무수한 기호들 속에서 우리가 바라보았다 믿었던 것들을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우리 자신의 시선을 잃고, 눈 맞춰 우리를 바라봐주는 당신들을 잃어버리면서, 한 사람이 영영 부재하는 시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쓰일 수 있는 사망진단서처럼 언제나 '멀어진' 상태로만 쓰일 우리의 언어들은, 우리의 잘못인가. 우리는 이 '잘못'들을 끝내,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 (p. 시 217-218 / 론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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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시』 2020-5월호 <현대시작품상 이달의 추천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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