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아지트/ 강미영

검지 정숙자 2020. 6. 13. 16:40

 

 

    아지트

 

    강미영

 

 

  횡단보도 건너 건물지하에 아지트가 있었네

  아파트가 아닌 아지트에는 네온사인이 반짝거렸지

  누구나 그 아지트에서 만날 수 있었으니까

 

  하얀 벽면의 썰렁한 공기를 만지작거리며

  손을 뻗어 시를 쏟아내곤 했지

 

  주인은 키 큰 시인 아저씨

  털모자와 곱슬머리가 어울렸던가

  18층 아파트에서 아지트를 내려다보며

  불빛 꺼지는 시간대를 점쳐보기도 했었지

 

  70년대 우리들의 아지트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작두콩이 들어간 백숙을 먹으며

  친구들의 웃음이 보이지 않아 슬펐지

 

  예쁜 목소리가 전화를 걸어오기도 했지

  어디세요, 라고 물어오기라도 하면 나의 발걸음은 혁명가처럼

  작두를 타는 것도 아니면서

  작두콩이 들어간 백숙의 다리를 찢곤 했지

  작두 탄 문장은 정말 맛이 있었거든

 

  그때의 우리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작두를 타고 있는 걸까

  작두로 삶을 토막 내고 있는 걸까

 

  버스에서 내리면 아지트라는 상호가 지워지지 않고

  임대문의 전화번호가 지령처럼 낯설다

  말라 비틀어진 낙엽들이 유리문 바닥에서 뒹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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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교문예』 2020-여름호 <신작시>에서

  * 강미영/ 2004년 『시와세계』로 등단, 시집 『Y는 느티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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