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어느 한때/ 정진혁

검지 정숙자 2020. 6. 13. 15:32

 

 

    어느 한때

 

    정진혁

 

 

  누나가 죽었을 때 진돗개 망고는 양은 밥그릇을 물어뜯었다 그러지 말라고 개밥 그릇으로 머리통을 때려도 밥은 엎어버린 채 계속 물어뜯었다 잇몸에 피가 나도록

 

   며칠 후 형은 망고를 데리고 광교천으로 갔다 냇가에 앉아 그 둘은 멀리 광교산을 바라보았다고 했다 하염없이 흐르는 구름을 바라보았다고 했다

  한참을 아무 말 없이 물처럼 흘렀다고 했다 무거운 바위 하나가 시간을 짓누르고 있었다고 했다 형은 뭔가를 잊어버린 눈으로 돌아왔고 그날부터 망고는 개밥 그릇 물어뜯는 걸 그만두었다 그리고 전처럼 고양이 치치를 괴롭혔다

 

  물은 언제나 두려움이 적은 쪽으로 흐른다는 걸 알았다

  인간은 어떤가

 

  나는 그저 뒷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백일홍을 바라보았다 백일홍의 색이 바랠 때까지

  그저 바라보았다

  흐르는 건 흐르는 동안에 있었다

  슬픔 같은 것을 바라보았다 바랜 보라이기도 하고 노랑이기도 한 감정들이

  뒷마당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전문, 226-227쪽

 

 

    ----------------

   * 『계간파란』 2020-여름호 <discussion>에서

   * 좌담/ 제목: 이후의 정념들/ 일시: 2020년 4월 4일 오후 1시

   * 참가자/ 고주희  김건영  이찬  이현승  장석원  전영규  조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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