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두자

검지 정숙자 2020. 5. 5. 02:44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두자



  아득한 빌딩 공사장

  녹슨 철재 사다리 아래서

  노란 장화를 신은 남자가 올라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잠깐, 휘청이는 사이 사다리만 남고

  곤두박질치며 내려갔다가 튀어 오르지 못했던 죽음


  저 허공에는 무슨 파국이 저렇게도 무성할까

  구름도 바람소리도 지워지고

  소란과 침묵 사이

  흔들리는 것이 있었는데

  시끄럽게, 혹은 무관심하게 아득하게 펼쳐진 플롯

  인과성과 무관한 구도적인 자세로


  파국은 무엇을 위해 울음을 삼킬까

  손을 내밀면 저쪽 끝까지 두 팔 벌려 안아주는

  뜨겁거나 시린 햇살, 별들로만 쏟아져 내리던

  저 환한 행성으로 채워진 곳

  꽉 차 있거나 너무 비어 있어서 나도 당신도

  머뭇거리다 이끌려 간 후, 꼭 한 번 만나게 되는

 

  사이렌도 울리지 않은 정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빌딩만 쑥쑥 자라났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이 시에서 시인은 건물 공사장의 비계를 바라보고 있다. 비계는 없는 것 즉 허공을 향해 있는 계단이다. 그 계단에서 한 인부가 추락사하는 사고를 상상한다. 그러나 상상이기 때문에 사실은 아무 일도 알어나지 않는다. 시인은 이런 상상을 통해 시간마저도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완벽한 부재와 그 부재가 결국 "빌딩만 쑥쑥 자라"나게 하는 우리의 문명과 삶을 만들었음을 보여준다. 얼마나 우리의 삶이 허망한 것에 기대서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p. 시 112/ 론 151) (황정산/ 시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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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프릴 원피스와 생쥐』에서/ 2020. 4. 10. <현대시학> 펴냄

  * 하두자/ 부산 출생, 1998년 『심상』으로 등단, 시집 『물수제비 뜨는 호수』『물의 집에 들다』『불안에게 들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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