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
- 백제시편 11
문효치
싸움은 이미 지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계백의 오천 병사는 죽기 위해 싸웠다 그것이 그들의 죽는 방법이었다 무덤의 앞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면서 그들은 각각 한 덩이의 단단한 빛이 되어 달려 들어갔다 빛은 이 땅에 선 것들을 밝히고 그 후예의 눈을 밝혔다 죽음의 고통은 순간이었고 그 순간의 좁은 통로를 지나면 곧바로 무덤의 뒷문이 열렸다 그리고 뒷문을 통해 무한의 자유에로 나갔다 그들의 죽는 방법은 이렇게 당당하고 지혜로웠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이미 질 것이 분명한 싸움이지만, 피하지 않았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삶의 어떤 국면 속에서도 도망치지 않는 실존의 의지를 의미한다. 전장에 나간 백제의 오천 병사는 당당하게 자신의 죽음을 선택한다. 그들은 적군 앞에서 도망가지 않는다. 이들 모두는 평범하게 태어났으나 마지막 순간에는 숭고한 죽음을 맞이한다. 중요한 것은 이처럼 평범 속에 깃드는 숭고함은 미래를 열어주는 윤리적인 힘을 지닌다는 사실이다. 한 존재의 죽음은 단지 그 하나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어떻게 죽음을 선택하는가에 대한 문제는, 나 자신을 넘어 미래 세대에 대한 윤리적인 선택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빛은 이 땅에 선 것을 밝히고" 마침내 "그 후예의 눈"을 뜨게 한다. 시인이 말하는 삶의 "지혜"란 바로 이런 것이다. 나의 내부에 나 자신도 모르게 존재하고 있었던 타자를 위한 숭고한 의지를 끌어낼 때 비로소 우리는 존재의 의미를 다한다. 백제는 사라진 땅이 아니라 현재의 심연이 된다.(p. 시 74/ 론 101) (신진숙/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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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선집『각시붓꽃』에서/ 2015. 5. 20. <지혜> 펴냄
* 문효치/ 1943년 전북 군산 출생, 1966년 《한국일보》&《서울신문》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연기 속에 서서』 『남내리 엽서』『칠지도』등 , 시전집『문효치 시전집』, 시선집『저기 고향이 보이네』『대왕암 일출』등, <정지용문학상> <동국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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