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꼭, 꼭, 숨바꼭질/ 하두자

검지 정숙자 2020. 5. 5. 03:01



    꼭, 꼭, 숨바꼭질


    하두자



  이제 우리 그만해, 사라지는 속도를 배웅하며, 골목 끝 너의 머리카락이 보여도, 너의 옷솔기가 보여도, 뒤돌아서 못 본 척 할 거야, 이제 그만 놓아줘, 나에 대한 기억이 어두워지면 그만 돌아가, 외면하는 방법은 이미 터득했잖아, 모서리가 세 개인 뾰족한 삼각형처럼, 널 찔러대는 기억이 지워지면 좋겠네, 방명록에서 헐렁거리는 구두 한 짝 버려도 좋아, 실핏줄은 뿌리를 내려야 한다고, 쓰다듬던 손은 가시 덩굴손이 되어 담벼락을 휘감아 올라가고, 아, 소리도 잃고, 어둠을 뱉어내고, 넌 빨판처럼 날 불러대고, 나를 삼키고 떠나버린 눈먼 고양이, 목덜미를 눌러대는 갸릉대는 웃음소리, 골목들이 수군거리고 길을 비켜가네, 사라지고 싶던 날의 연속이었어, 눈치 채고 있었지? 그래 때론 살고 싶었어, 서둘러 빠져나온 새벽안개 얼굴같이, 조금씩 지워지고 싶었어, 안개는 도대체 몇 개의 서랍을 감추고 있는 걸까, 얼룩과 추억에 대해 너도 제발 어디든지 사라져 버려, 어제는 지겨웠고 오늘은 씁쓸했어, 함께한 날들이 하루보다 짧았다고 까만 안경을 쓴 채 나는 붉은 달력 속으로 꼭꼭 숨고 말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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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프릴 원피스와 생쥐』에서/ 2020. 4. 10. <현대시학> 펴냄

  * 하두자/ 부산 출생, 1998년 『심상』으로 등단, 시집 『물수제비 뜨는 호수』『물의 집에 들다』『불안에게 들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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