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음
정숙자
티셔츠는 발언권이 없다. 그에게 기회를 줘야 될까 생각해 본 적도 없
다. 그런데 옷걸이에 빨아 넌 티셔츠가 문득 종소리를 푸는 게 아닌가.
하나를 풀면 또 하나가, 또 하나를 풀면 또 하나가, 또 하나를 풀면
또 하나가 한나절 내내 동심원을 일으키는 게 아닌가.
그 범종소리에 귀 기울이자 (S의)맥박, (S의)호흡, (S의)혈압이 한
동그라미씩… 한 동그라미씩… 한 동그라미씩… 떠오르는 게 아닌가.
오호라, 티셔츠와 S는 오랜 동안 입고 입혀진 사이, 오랜 동안 입고
입혀져 한 몸으로 굳어진 사이, 깊고 푸른 체험과 흉곽을 공유한 사이.
“어떤 이는 시로써 밥을 벌고~ 어떤 이는 시로써 명예를 벌고~ 어
떤 이는 시로써 권력을 벌었으나~ 그대는 오로지 시로써 시를 벌었을
뿐이니~ 그 또한 톡톡하지 아니한가~”
빨아도 으깨지지 않고 널어도 증발하지 않는 (S의)심장, (S의)이성,
(S의)목메임을 어느 층위에서도 잘 알아듣고 화답하는 티셔츠.
아직도 갈 길이 멀다. 발언권 따위는 자동소멸. 범종 울려주는 티
셔츠 곁엔 S의 덫 없는 환상, 그 덧없는 의자 곁엔 ‘S’를 뛰어넘는 티
셔츠 묵상.
*『시사사』2012-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