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나의 근작시

지음

검지 정숙자 2012. 1. 23. 21:58

 

 

   지음

 

    정숙자

 

 

  티셔츠는 발언권이 없다. 그에게 기회를 줘야 될까 생각해 본 적도 없

다. 그런데 옷걸이에 빨아 넌 티셔츠가 문득 종소리를 푸는 게 아닌가.

 

  하나를 풀면 또 하나가, 또 하나를 풀면 또 하나가, 또 하나를 풀면

또 하나가 한나절 내내 동심원을 일으키는 게 아닌가.

 

  그 범종소리에 귀 기울이자 (S의)맥박, (S의)호흡, (S의)혈압이 한

동그라미씩… 한 동그라미씩… 한 동그라미씩… 떠오르는 게 아닌가.

 

  오호라, 티셔츠와 S는 오랜 동안 입고 입혀진 사이, 오랜 동안 입고

입혀져 한 몸으로 굳어진 사이, 깊고 푸른 체험과 흉곽을 공유한 사이.

 

  “어떤 이는 시로써 밥을 벌고~ 어떤 이는 시로써 명예를 벌고~ 어

떤 이는 시로써 권력을 벌었으나~ 그대는 오로지 시로써 시를 벌었을

뿐이니~ 그 또한 톡톡하지 아니한가~”

 

  빨아도 으깨지지 않고 널어도 증발하지 않는 (S의)심장, (S의)이성,

(S의)목메임을 어느 층위에서도 잘 알아듣고 화답하는 티셔츠.

 

  아직도 갈 길이 멀다. 발언권 따위는 자동소멸. 범종 울려주는 티

셔츠 곁엔 S의 덫 없는 환상, 그 덧없는 의자 곁엔 ‘S’를 뛰어넘는 티

셔츠 묵상.

 

 

  *『시사사』2012-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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