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언>
꽃은 시 속에서 어떻게 피고 있는가
문효치/ 시인, 한국문인협회 명예회장
우리는 꽃을 좋아한다. 그 빛깔, 모양, 향기 등 꽃의 모든 것을 좋아한다.
과거에는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를 사군자라 해서 숭상하기도 했다. 그 사군자 중 대나무를 빼고는 모두 꽃이다. 퇴계 선생이 타계하기 전에 맨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저 매화나무에 물 줘라."였다고 한다.
꽃은 식물학적으로 보면 나무나 풀의 생식기관이지만 일반 사람들은 그보다도 심미적 대상으로 완상한다. 시나 그림에 등장하는 꽃들은 거의가 아름다움의 표상으로 존재하고 있음이다.
나는 6·25전쟁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다. 전쟁이란 말 그대로 참혹'과 '살벌', 그리고 인간의내적 외적 파괴 행위다. 그 결과는 죽음과 가난과 불행이다. 우리나라가 전쟁의 한가운데 놓여 있던 그 시절 나는 어머니를 따라 벽촌의 어느 농가에서 피난살이를 하고 있었다. 공포와 극빈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던 마을, 그러나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몇 안 되는 작고 허름한 초가집 앞뒤뜰에는 모두 화초를 심어 기르고 있었다. 분꽃, 봉숭아, 채송화, 접시꽃, 해바라기 등이 전쟁과는 아무 상관없이 피어 있었다.
그들은 왜 전쟁과 기아의 황망함 속에서도 돈이 되는 것도 아니요 밥이 되는 것도 아닌 꽃을 심고 가꾸었을까? 왜 그 꽃들에 바가지로 물을 퍼다 부어 주었을까? 그것은 한마디로 좋아했기 때문일 것이다. '좋아한다'는 그 한마디 외에 무슨 다른 이유를 댈 수 있겠는가?
송강 정철은 "한 잔 먹세 그려 또 한 잔 먹세 그려 꽃 꺾어 산 놓고 무진무진 먹세 그려"라고 했다. 아마도 '자원방래自遠方來'한 유붕有朋과 반갑게 술을 마시고 있었을 터이다. 그때에 꽃을 참여시키는 심미안이 대단하다. 하기야 이백도 '양인대작 산화개兩人對酌 山花開'라 하지 않았는가. 두 사람이 술을 마시고 있는데 마침 산꽃이 피어 아는 체하는 장면이다.
시인들은 그 시 속에 꽃을 들여 피우기 마련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누님같이 본 서정주나 난초 잎에 꿈이 온다고 노래한 정지용, 코스모스를 모자 쓴 소녀 같다고 한 김형영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시인들이 그들의 시 속에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꽃들을 많이 들여놓고 있다.
그런데 위에 쓴 시인들은 꽃의 마음을 들여다보거나 말을 듣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 꽃, 그것도 조물주가 만들어 놓은 작품이다. 그렇다면 그 생명이 매우 소중하고 무슨 뜻이 있을 것이다. 뜻이 있다면 생각도 있을 것이고 생각이 있으면 할 말도 있을 것이다.
시인은 그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꽃의 겉모습이 아닌 속에 내장된 비의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조지훈의 「낙화 2」는 음미해 볼 만한 시다.
피었다 몰래 지는
고운 마음을
흰 무리 쓴 촛불이
홀로 아노니
꽃 지는 소리
하도 가늘어
귀 기울여 듣기에도
조심스러라
두견이도 한 목청
울고 지친 밤
나 혼자만 잠들기
못내 설어라
-전문, 조지훈「낙화 2」
조지훈은 꽃의 마음을 알아보고 있다. 꽃 지는 소리는 하도 가늘어서 잘 들리지 않겠지만 시인은 그 의미까지도 알아내고 있다. 꽃은 왁자하게 또는 시끄럽게 피는 꽃도 있지만 남몰래 가만히 피었다 다소곳이 지는 꽃도 있다. 다 나름대로 생각이 있고 뜻이 있어서 그럴 것이다.
어느 해던가 공주 공산성에 간 일이 있다. 그곳은 옛 백제의 궁궐이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 흔적이 거의 없다. 어쩌면 의미가 사라져 버린 허무한 공간이다. 거기에 피는 들꽃은 왜 하필 거기에 자리 잡고 피어 있을까. 허무를 말하고자 함이었을까, 권력의 무상함을 말하고자 했을까.
그 꽃의 속내가 매우 궁금했다. 신은 왜 하필 이 시절에 이 꽃을 여기에 있게 했을까. 꽃의 말을 들어 보고 싶었다. 허공중에 흩어져 날아다니고 있는 꽃의 말을 듣기 위해서는 안테나를 뻗어 날아다니는 음파를 잡아야 한다. 희미하게 겨우 들어 볼 수 있는 소리, '나에게 의미 부여하지 말아라 그냥 자유롭게 있다가 다시 먼지가 되어 흩어질 것인 즉' 나는 이 말을 시로 만들기 위해 낑낑대다가 「공산성의 들꽃」이라는 시를 쓴 일이 있다.
장미, 백합, 난, 국화 이런 유명한 꽃만이 꽃이 아니다. 개망초, 좁쌀냉이, 땅빈대, 쇠비름, 며느리밑씻개, 방동사니 같은 들풀의 꽃도 꽃이다. 그들도 똑같은 신의 작품들이다. 공원의 시멘트 계단을 오르다가 갈라진 틈새에 연약하게 피어난 들꽃을 보았다. 그의 처지에서 보면 최악의 환경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다른 풀들은 넓은 들에서 혹은 물 맑고 공기 좋은 산기슭에서 살고 있는데 유독 이 풀은 이렇게도 비좁은 틈바구니에서 살고 있을까. 얼마나 고통스럽고 불만이 클까. 자주 오르내리는 이들의 신발에 밟히지나 않을까 두렵기도 할 텐데, 거기에서 잎 피고 꽃도 피워 올리고 또 씨앗도 맺어 후손도 퍼뜨리고 있었다. 묵묵히 제 할 바를 다 하고 있었다.
그 풀 속에서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아름다운 생명을 간직한 채 뜨거운 낮에는 씨앗을 키우고 밤이 되면 우주의 별들을 바라보며 무언가 이야기도 나누며 생애를 엮어 나가고 있었다.
문득 박양균의 '꽃'이라는 제목의 시가 생각난다.
사람과 사람이 더불어 망한 이 황량한 전장에서 이름도 모를 꽃 한 송이 뉘의 위촉으로 피어났기에 상냥함을 발돋움하여 하늘과 맞섬이뇨 그 무지한 포성과 폭음과 고함과 마지막 살육의 피에 젖어 그렇게 육중한 지축이 흔들리었거늘 너는 오히려 정밀靜謐 속 끝없는 부드러움으로 자랐기에 가늘은 모가지를 하고 푸르른 천심에의 길 위에서 한 점 웃음으로 지우려는가
-전문, 박양균 「꽃」
시의 분위기로 봐서 이 꽃은 전쟁터에서 핀 작은 풀꽃으로 보인다. 그러나 꽃은 상냥하다. 그리고 포성, 폭음, 고함, 살육의 피에 젖은 하늘과 맞서고 있다. 꽃도 분명히 생각이 있어서 그럴 것이다. 시인은 이 풀꽃의 생각을 만나고 있다.
고대의 시에서는 대체로 꽃의 외형적 아름다움과 향기에 화자의 시선이 머무르고 있다. 그러나 현대의 시인들은 내면으로 시선을 옮겨 그 비의를 찾아내고 있다.
꽃 속에는 별의별 세계가 다 들어 있다. 김광균은 해바라기 꽃 속에서 늙은 어머니가 물레를 돌리고 있는 낡은 집을 찾아내고(「해바라기 감상」), 강민은 순색을 잃은 피가 꽃 속을 흐르고 있음을 보고 있다(「꽃 속에 들어가」). 어디 꽃뿐이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그것들의 껍질 속 내면에는 무궁무진한 비의가 숨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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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인』2020-봄호 <권두언>에서
* 문효치/ 시인, 한국문인협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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