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나비표본 상자/ 마경덕

검지 정숙자 2020. 4. 11. 03:04



    나비표본 상자


    마경덕



  화려한 옷들이 진열장에 걸려있다 나비는 바느질의 달인 생전에 가봉을 하던 버릇대로 가슴에 시침핀을 꽂고 있다 덧댄 자국 없는 천의무봉의 솜씨들 그동안 주름잡은 허공은 몇 필인지…


  꽃밭은 원단 도매상, 치수에 밝은 나비는 둘둘 말린 대롱줄자를 꺼내 길이를 잰다 갖가지 원단은 꽃에서 나온다 호랑나비 가문은 얼룩무늬, 배추밭이 친정인 노랑나비는 배추고갱이처럼 노랗다 대대로 한 무늬만 고집한 나비의 계보에 유행은 없다


  옷 한 벌을 짓기 위해 평생을 바친 장인들, 날개옷 한 벌을 완성하고 유리무덤에 갇혔다 입으면 벗을 수 없는, 아름다운 그 옷이 화근이다


  나비는 죽어도 날개를 접지 않는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유폐인들은  쇼윈도를 응시하지만 사실 쇼윈도가 그를 응시한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그가 사용한 메타포 "유리무덤"은 그런 쇼윈도의 상징이다. "나비"가 지어 입은 옷이 유폐인들의 일상이라면 그들은 옷을 입어 몸을 감춘다기보다는 오히려 드러내는 것이다. 사실상 우리가 입은 옷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신분을 말해주고, 종국적으로 도회적 삶이 얼마나 허무한가를 보여준다. 속이 꽉 찬 사람들이나 자연에 속한 사람들은 옷으로 자기를 포장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 시에서 나비는 자기가 응시되는 줄 알지 못한다는 메시지를 말한다. 도시가 만들어내는 눈과 눈의 마주침은 전통적인 사유방식을 포기하게 만들지 않는가! 근대의 시인들은 주체-눈-대상의 관계를 일직선으로 파악해왔다. 그러나 대도시의 문명인은 이렇게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도시에서는 "대상이 나를 지각한다"는 파울 클레의 말처럼 "나비"가 나를 지각하는 동시에 '유폐인'이 "나비"를 지각하기 때문이다. 파리의 도시민 조르주 뒤아멜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가 무엇을 생각하려는지 더 이상 생각할 수 없다. 움직이는 이미지가 나의 사유 자리를 차지해 버렸다"(발터 벤야민,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이제 유폐된 도시인은 "누가 보고 있는지 누가 보여지고 있는지를 더 이상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날개옷 한 벌을 완성하고 유리무덤에 갇힌" 나비는 영락없는 유폐자의 모습을 띠고 있다. 그의 유폐는 이외에도 다양한 이항으로 끝없는 만화경을 이룬다 (p. 시 29/ 론 147-148)  (변학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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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그녀의 외로움은 B형(2012년 刊『글러브 중독자』개정판)에서/ 2020. 3. 25. <상상인> 펴냄

   * 마경덕/ 전남 여수 출생, 2003년《세계일보》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신발論』『글러브 중독자』『사물의 입』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