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은 여러 종류의 검정 외 1편
구현우
흰 시계탑 아래에서 만났지 정오의 어두움 광장과 민낯 무분별한 화합 그런 것들 건강한 아픔이 있다 행인이 말하는 걸 일행도 아닌 내가 들었다 열두시가 지나서야 겨우 너를 찾았다 언제나 제때 오는 것은 없다 종소리가 멎었으나 아무렴 어떤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않기로 했다 둘이 있어도 둘이 아니어도 다만 하나의 술픔이었다.
회복에 전념하는 시간이 있었다 시계탑 왼편에서 나아질 때를 기다렸다 사람의 눈으로는 구분할 수 없겠지만 감정은 여러 종류의 검정 보이지 않는 것을 부를 수는 있으니 병일 수밖에 80년대에 태어난 내가 70년대에 만들어진 거리를 걷고 있었다 세상의 아름다움을 오롯이 볼 수 있는 때가 있었다는 거다 웃고 있는 네가 외로워 보인다고 하면서 너는 더 크게 웃어버리는구나 인간이 언어를 익히면 비로소 모든 색을 쓸 수 있지만 신은 언어를 아는 자에게 검은 잉크밖에 주지 않는다 사람의 사랑은 불완전하므로, 하나의 마음이 둘의 몸을 쓴다 낮으로 흐르든 밤으로 쏟아지든 시계는 늘 열두 시를 향해 움직일 뿐이다
한마디 말의 간격으로 늙어가는 중이었다 사실은 나의 동물이 나를 키웠다 2000년의 여름 오후 세 시와 1900년의 겨울 오후 다섯 시가 겹쳐진다 비극은 결국 한 가지인가 너의 검정은 샘플이 없는 또다른 검정이었다 무거운 마음이 입밖으로 나오자 가벼운 말이 되었다 네가 여기로 오기 전부터 만남은 실현되었다 눈이 내렸고 우리의 손에서, 손안에서 많은 결정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 도시에서 고장날 일이 없는 건 시계탑만이 유일했다 이번 생에서 너와 내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한 건 아니지만
다음날에는
그다음,
다음날에는, 한 번 더, 첫사랑이기를, 그렇게 되뇌면서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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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정원
한낮의 정원에서 아픈 꿈을 꿨다 막연하니까 더 분명한 마음이 있었다 한밤의 초목 완연한 구조물 앞에서도 통증이 지속되었다
꿈속에는 둘만 있었고
모르는 너를 아는 이름으로 불러주고 싶었지만 혀끝이 굳어버렸고 흙냄새가 지독하게
너무나 독하게 감돌았다
실재하는 정경이 꿈의 정원을 닮아간다는 게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한낱 코끝에 맺혀 있는 네가
어떻게 미워질 수 있는지 신비로웠다
마지막을 짐작하지 못해서 꿈은 다만 끝을 향해 가고만 있었다
물린 데가 없는데도
말할 수 없는 어느 부위가
참을 수 없이 가려웠다
아무도 나를 기다리지 않고 아무것도 끝난 건 없어서
아픈 곳이 늘어난 후에야 비로소 천국을 그리워했다
예술이 있는 정원을 벗어나고도 나의 서사는 정원의 일부였고 하나의 그늘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만두는 일은 죽는 일이었다
불행한 냄새를 그렇게 계속 믿고 있었다
도중에 네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막막한 사실이었다
이제 그만 눈을 뜨라는 건 살면서 들어본 가장 잔인하고 슬픈 일이었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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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나의 9월은 너의 3월』에서/ 2020. 3. 31. <문학동네> 펴냄
* 구현우/ 1989년 서울 출생, 2014년 『문학동네』신인상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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