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이발소 그림/ 곽효환

검지 정숙자 2020. 3. 20. 08:42



    이발소 그림


    곽효환



  삶이 나를 속일지라도 아니 삶이 나를 속인다 해도

  나는 이발소에 간다

  이곳저곳 얼룩지고 벗겨진 거울, 오래된 가위가 있는

  뒷골목 평화이발관


  성자께서 열두 제자와 나누는 최후의 만찬

  '오늘도 무사히'를 간절히 비는 어린 소녀의 경건한 얼굴

  전나무 울창한 숲에 둘러싸인 시원스레 쏟아져 내리는 폭포

  금빛으로 물드는 전원에 물레방아 도는 아담한 초가집 한 채

  십여 마리가 넘는 새끼 돼지들에게 젖을 먹이는 어미 돼지

  우리의 바람과 꿈을 이토록 정교하게 대량으로 모사해내는

  삶과 예술이 때론 어설프게 때론 절묘하게 만나는

  희망공작소 그림들의 안녕과 풍요를

  누가 이발소 그림이라고 이름 지었을까

  이 그리운 풍경과 삶을 누가 싸구려 통속이라고 했을까


  어떤 삶이 고단한 당신을 속였는가

  하여 우울하고 슬퍼하고 노여웠는가


  시퍼렇게 날이 선 면도칼 아래 하얀 목을 맡겨두고도

  곤히 잠을 청하는

  평화이발관 그림 아래 안식

  빨갛고 파랗고 하얀 낡은 삼색 표시등

  하루 종일 털털거리고 도는

  저렴한 그러나 대담한 선과 원색의 색채가 내뿜는

  아우라가 깃든 내 첫 번째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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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슬픔의 뼈대』에서/ 초판 2014. 1. 10./ 2017. 8. 16. 초판 3쇄 <문학과지성사> 펴냄

  * 곽효환/ 1967년 전북 전주 출생, 1996년《세계일보》 2002년『시평』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시집『인디오 여인』『지도에 없는 집』, 연구서『한국 근대시의 북방의식』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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