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세 살의 누나 외 1편
장재선
스물세 살의 음대생이었던 누나가 나를 데리고 이 연못에 왜 왔는지는 잊었으나, 못물에 발을 씻으며 노래를 부르던 모습은 또렷하다. 스무 살의 나를 시종처럼 거느리고 먼 나라의 왕녀처럼 쌀쌀맞아도 좋았으련만, 늘 서그럽게 웃던 누나는 그 날 많은 말을 했지만, 그저 발을 씻는 것처럼 뜻없는 것들이었고, 그로부터 일주일 후 누나가 시집을 갔다고 누나의 어머니가 전해줬다. 그때 그 서운한 젊음으로는 이토록 오햇동안 만나지 못할 것을 몰랐으나,
누나의 딸과,
그 딸의 딸이 누군가와 함께
이 연못헤서 발을 씻을 때까지
내 기억이 살아서
못물의 그림자에 흔들리기를.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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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을 읽으며 아이의 잠과 싸우다
아이가 학교에 가지 않는 토요일, 아침 아홉시 반에 깨워 달라는 아이를 열 시 반에 깨웠다. 영어 공부를 하다가 새벽에 잠이 든 아이가 더 잤으면 해서였다. 아이는 비비적거리며 일어나 수학 문제집을 펼치더니 이내 고개를 꺾고 있다. 학원 숙제가 있다는 걸 알기에 몸을 흔들어 깨웠는데, 손에 닿는 아이의 갈비뼈가 가느다랗다.
녀석이 나가 달라고 했으나 나는 아이 책상 옆 의자에서 일어서지 못했다. 새끼가 혼자 큰 짐승과 싸으고 있는 것 같아서 그 곁을 떠나지 못하는 심정이었다면 아이는 뭇었을까.
고영민 시집 『공손한 손』을 손에 들고 아버지랑 과수원에서 농약 치던 대목을 읽다가 거실로 나가 사과를 깎았다. 사과를 좋아하는 녀석인데 빈속에 먹기 싫다며 고개를 저었다. 접시를 도로 내오며 엉뚱한 소리를 뱉는다. "너, 그렇게 구부린 자세로 공부하면 안 돼. 그러니까 허리가 아프지."
시집 한 권을 다 읽는 동안 아이는 얘어있는 듯했는데 어느새 침대에 쓰러져 있다. "이렇게 자도 되는 거야." "응, 다 했어요." "그럼, 빨리 씻고 밥 먹어야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불을 가져다가 덮어 줬다.
방의 불을 끈 다음에 조용히 나왔다. 독한 놈과 온 힘을 다해 겨운 것처럼 어깨가 뻐근했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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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기울지 않는 길』에서/ 2020. 1. 6. <서정시학> 펴냄
* 장재선/ 1966년 전북 김제 출생, 『시문학』에 작품 발표하며 시작 활동, 시집『am7이 만난 사랑의 시』『시로 만난 별』, 산문집 『영화로 만난 세상』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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