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나의 근작시

시간-전쟁

검지 정숙자 2020. 3. 14. 00:33



    시간-전쟁


    정숙자



  칼칼한 자모음 얻기 위해선, 목표 지점과 의욕을 잇기 위해선, 그 깊이와 폭을 담아내기 위해선 뭣보다도 충분한 시간이 우선되어야 한다.


  공간이야 어디라도 괜찮지,만

  시간은 다르다

  경험칙으로 암산해 볼 때

  좀 낭비해도 될성싶은 시간-영역 내에서만 기습적 한 획은 가능한 일

  텅 빈 시간과 요새를 확보하기 위해서라면 웬만한 현실은 참아야 하고, 거기 적응해야 하고… 못 흘린 눈물 하늘에 닿으리만치


  한 문장은 그렇게 오는 것이(었)다


  알 수도 없는 곳으로부터 걸어오는 것이었다. 기어오는 것이었다. 쓰러지며, 쓰러지며 하얘지며, 겨우-겨우 몇 음절씩 끌고 오는 것이었다. 남들은 1초에 읽고 넘겨버릴 문장이 저자에게는 전 생애를 바쳐야 가능한 답이었다.


  운명/숙명을 다 걸어도 꺾을 수 없는 한 문장, 빗돌에 가둬도 좋을 법한 그런 문장은 한 사람의 뼈를 몽땅 불태워야만 건질 수 있는 구슬이었던 것이다.


  그 숲에 떨어진, 나는

  깎아지른 시간을 배정받았다,는 게 어찌 보면 행운이 아닐 수 없다

  퍼석한 관절들 한 알의 구슬로 요약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아닌들 어때!

  이리 늙도록 (홀로) 읽고, 쓰고… 첫새벽까지 볼펜을 쥐고 고투하는 시간-그늘

  참으로 푸르지 아니한가?


  라고, 냉철한 도플갱어가 서늘히

  침묵 한 컷 건네주는 안전-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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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래시학』 2020-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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