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박수현
에레나 할머니는 우리 이웃, 그녀의 뜰에는
사과나무가 푸르다
가으내 그녀는 사과의 속살을 저며 애플파이나 사과를 밀가루 반죽에 싸서 구운 아펠슈트루델이나 혹은 팬케이크 아펠판쿠헨을 굽는다 큰 유리병에 아펠바인을 담그기도 한다
오븐에서 서과 향이 익는 동안
유리병의 사과들이 발효하는 동안
할머니는 장미과 과일 중 가장 오래된 열매의 어둠을 갈무리한다
사과는 그녀에게 시장기 같은 것
검지를 입술에 대며 쉿! 하던 아버지의 어두운 목소리 같은 것
숨죽여 베어 먹던 서늘한 사과의 기억
사과는 얼마나 자주 하켄크로이츠 나치 깃발을 나부끼게 했던가
사과와 탄피는 왜 둘 다 작고 반질거리는가
문지르면 왜 뽀드득 말간 소리가 나는가
바둥대며 끌려가다
뒤돌아보던 아버지의 핏발 선 눈동자
그때 소녀가 할 수 있는 건
사과가 흘린 핏자국들을 훔치며
썩은 사과처럼 지하실 구석을 굴러다니는 것뿐
가을이 오면 사과나무는 여전히 붉게 기침을 한다
나무 바깥으로 자꾸 뛰쳐나가려는 북서풍의 후예들
그 옛날, 시베리아에서 코카서스산맥을 넘어온 그것
캄캄한 제 삼장에서 다섯 개의 별을 꺼낸다
사과로 만든 그녀의 디저트와 와인을 마시며
사과가 거느린 치사량의 둘레를 가늠하기엔
그해 가을은 너무 짧았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시인은 이 시의 배경과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지 않고 대뜸 "에레나 할머니는 우리 이웃"이라고만 밝히고 그녀의 뜰에 사과나무가 푸르다는 사실을 제시했다. 구구한 사정을 이야기하기 이전에 그녀에 대한 사랑과 연민이 시인의 가슴을 메웠을 것이다. '놋주발'보다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가슴을 흔들 때 시를 써야 언어와 정서의 밀도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에레나"라는 이름으로 보아 이 할머니는 유대계나 헝가리계 사람일 것이다. 할머니의 뜰에 사과나무가 푸르다는 사실은 대조의 감정을 일으킨다. 청춘의 푸른 사과를 관장하는 사람이 늙은 할머니라니./ 사과로 못 만드는 요리가 없는 할머니지만 그녀에게는 아픈 추억이 있다. 붉은 사과의 열정처럼 나치의 갈고리 삽자가 걸린 기폭이 나부꼈을 때 그의 가족은 시체처럼 숨어 살았다. 검지를 입술에 대며 쉿! 하던 아버지의 어두운 목소리가 번져오고 숨죽여 베어 먹던 서늘한 사과의 기억이 흉곽 어디에 남아있다. 칠십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버둥대며 끌려가다 뒤돌아보던 아버지의 핏발 선 눈동자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래도 할머니는 말이 없고 자신이 만든 맛있는 음식을 대접할 뿐이다. 사과의 기원을 거슬러 오르면 시베리아 코카서스에서 푹서풍을 따라왔다는데 에레나 할머니도 그런 삶을 살아온 것일까? 그녀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가을이 지났고 사과의 계절도 끝나고 말았다.(p. 시 16/ 론123) (이숭원/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