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파트의 글

강기옥_자연환경과 문화공간 『서초 이야기 · 1』 「반포천」

검지 정숙자 2020. 2. 18. 01:51



    피천득 산책로를 따라 걷는

    반포천


    강기옥 / 시인, 칼럼니스트



  고속터미널역에서 이수교차로에 이르는 피천득 산책로는 1980년부터 2007년까지 근처 반포주공아파트에 살았던 수필가 피천득이 반포천 둑길을 즐겨 걸었다는 인연으로 조성된 산책로이다. 산책로 아래쪽으로는 반포천이 이어진다.



  글 쓰는 사람을 평할 때 '글은 곧 그 사람'이라는 말을 즐겨 쓴다. 이 짧은 문장 속에 나타난 '사람'은 인격을 뜻하기 때문에 글쓴이의 인격이 숨어 있다는 뜻으로 확대 해석하기도 한다. 서초구에는 위와 같이 글쓴이의 인격을 정의한 명제를 생각하며 걸을 수 있는 거리가 있다. 고속버스터미날역에서부터 이수교차로까지 1.7km에 이르는 반포천변의 '피천득 산책로'다.

  반포천은 우면산에서 발원하여 방배동 남단에서 사당천과 합류, 더 넓은 곳으로 흘러드는 한강의 지류다. 반포천이 서초구민의 문화적 본질을 이루는 우면산에서 발원했다는 것은 이 지역의 정신문화와 관련이 깊다는 인연을 말해준다. 더구나 반포천은 원래 물길이 서리서리 흐른다 하여 '서릿개'라 했는데 한자로는 반포천蟠浦川으로 표기한다. 그러나 이제는 반포천에 쟁반처럼 둥글고 큰 바위가 있다 하여 쟁반이나 큰 돌을 뜻하는 반을 사용하여 반포천盤浦川으로 표기한다. 그런데 반포천변을 '피천득 산책로'로 승화시킨 것은 인문학의 보고인 지명과 관련이 있어 흥미롭다. 즉 원래의 명칭대로 '서리서리'의 뜻을 대입하면 긴 줄을 둥글게 감아 사리듯 여러 가지 생각들이 연이어 떠올라 정신작업이 이루어지는 곳임을 의미한다. 결코 육체노동을 하는 곳이 아닌 사색의 장소로 태어날 천생적 운명을 띠고 있는 곳이다. 그래서일까. 서초구에는 한국 문단을 이끌어가는 문인과 문단의 맥을 굵게 이어가고 있는 대표적 문인이 많다.

  피천득 선생은 서울대학교에서 영문학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을 양성하는 중에도 순수한 서정시와 수필을 많이 쓴 시인이자 수필가다. 일반적으로는 「인연」을 비롯한 수필이 더 많이 알려져 시인보다는 수필가로 알고 있다. 맑고 청아한 글로 독자를 순수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흡인력이 있기 때문이기도 한데 그것은 선생이 지닌 문학적 순수성이자 마력이다. 이념이나 사상, 관념 등을 배제한 서정성으로 고결한 정신세계와 순수한 인간관계를 즐겨 쓰신 피천득 선생은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인생의 후반기라 할 1980년부터 2007년까지 28년 동안 반포주공아파트에서 살았다. 그 인연을 살려 서초구에서는 선생의 수수한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피천득 산책로를 조성한 것이다.

  "수필은 청자연적이요, 수필은 난이요, 학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다."라는 수필에 대한 정의는 그 어떤 설명보다 분명하고 공감적 특징이 있어 많은 사람이 기억한다. 그래서 선생은 청자연적과 같은 청아하고, 학이나 난과 같이 고결한 수필을 많이 썼다.

  '글은 곧 그 사람이다'는 말이 허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선생의 수필과 시에는 자신의 삶을 그대로 드러냈다. 곧 인격 그대로 글을 쓰셨기에 누구나 선생의 글에 심취한다. 이제 반포천변을 걷는 구민들은 보다 풍부하게 정신문화를 향유하며 걷는 여유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가벼운 산책을 통해 글과 말이 지닌 인간의 품위를 생각하는 인문학적 가치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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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기옥_자연환경과 문화 공간 『서초 이야기 · 1』에서/ 2019. 12. 20. <한국문화원연합회> 펴냄

 * 강기옥/ 시인, 칼럼니스트. 시집 『그대가 있어 행복했네』등, 평론집 『시의 숲을 거닐다』『느림의 계단에서 읽는 시』, 인문교양서 『문화재로 포장된 역사』『국토견문록』, 칼럼집 『칼을 가는 남자』등, 한국문협문학유적탐사 연구위원장,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