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길 1 외 1편/ 이채민

검지 정숙자 2020. 2. 19. 02:15



    길 1


    이채민



  어른을 배우지 못하고

  어른이 되었다


  한 사람을 해석하고

  아흔아홉 명과 결혼을 하고

  밥은 늘 설익어서 엄마가 다녀갔다


  서서히 신발이 낮아지고

  어른을 탈출하고 싶어졌다


  무성 영화 필름처럼

  아흔아홉 번의 연기는 계속 돌아갔지만

  내가 없고 우리가 희미하게 사라졌다


  어른은 날아간 지붕처럼

  돌아오지 않는다


  내일의 모자를 찾을 수 없는


  열심히 날아가버린

  날아가고 있는


  어른들

   -전문-



   -------------------

   몰다우강의 기도



  누구를 위한 고해입니까

  내 젖줄을 피로 물들게 한 당신의 의심은

  백 년을 걸어온 여행자의 배낭 속에서 아직도

  단단하게 흐르는데

  성벽을 넘은 반란 같은 바람이

  끊어진 내 동맥을 위문하고 흐느끼고 있음을 듣습니다


  왕이여

  이제는 무릎을 꿇으소서

  겁 많은 당신의 목쉰 울음을

  내가 들었습니다


  사위어가는 마지막 촛불이 밝아지듯

  당신의 진한 키스가 카를교 위에 환히 떠 있음을

  내가 보았습니다


  왕이여

  스며드는 나쁜 생각일랑 표피를 찢어내고

  아침 해 같은 기도에 머무소서

  당신을 위한 마지막 고해를

  죽은 꽃잎에 흩뿌려

  어느 하루 하얀 낮잠으로 피게 하소서

    -전문-



  * 체코의 강. 바츨라프 4세는 왕비의 고해성사를 듣고 싶었지만 끝내 입을 다문 성 네포무크와 왕비를 이 강물에 던져 죽게 함.



   --------------

  * 시집『오답이 출렁이는 저 무성함』에서/ 2019. 12. 15. <미네르바> 펴냄

  * 이채민/ 충남 논산 출생, 2004년 『미네르바』로 등단, 시집 『빛의 뿌리』 『동백을 뒤적이다』, 동인지『빠져본 적이 있다』


'시집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계단 길/ 윤홍조  (0) 2020.02.20
황령산의 봄/ 윤홍조  (0) 2020.02.20
잘가요, 명왕성/ 이채민  (0) 2020.02.19
겨울나무/ 강순  (0) 2020.02.16
즐거운 오렌지가 되는 법/ 강순  (0) 2020.0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