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서울의 로자 3/ 이현채

검지 정숙자 2020. 2. 11. 01:54



    서울의 로자 3


    이현채



  불행을 짊어지고 태어난 사람이 있었네.


  그의 몸에서 타인의 냄새가 날 때

  나는 그가

  낯선 이의 가슴을

  두드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네.


  모든 것이 오해와 착각과 거짓이기를 기도하지만,


  음란한 바람이여!

  범람하는 슬픔이여!


  그와 함께 지난 계절의 시체를 밟으며

  떡갈나무에 묻어 놓았던 사연을 찾아가네.


  나무들이 집단 시위하는 골목에서

  '세상에 빠져 죽지 마요' 하고 위로하지만


  나는 늪으로 점점 빠져들어

  침묵 속에서 흐느끼네.


  나에게 불행의 손길을 더 이상 내밀지 말아요, '고독과 절망을 노래하지 말아요. 운명에 트집 잡으며 악마와 손잡지 말아요. 더 이상 다른 사람에게 불행이라는 전염병을 퍼트리지 말아 주세요. '불행해서 기뻐요'라고 노래하지 말아 주세요.


  개들이 물어뜯는 창백한 웃음 사이로

  시의 무덤 속에서 나를 부르네.


    --------------

  * 시집『시뮬라시옹』에서/ 2020. 1. 23. <한국문연> 펴냄

  * 이현채李賢砦/ 1967년 충남 당진 출생, 2008년『창작 21』로 등단, 시집『투란도트의 수수께끼』


'시집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울음은 흉곽 주위를 맴돈다/ 김보숙  (0) 2020.02.12
시계 혹은 사계(四季)/ 김보숙  (0) 2020.02.11
시뮬라시옹/ 이현채   (0) 2020.02.11
칼의 기원/ 전기철  (0) 2020.02.08
밤의 카페/ 전기철  (0) 2020.0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