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시뮬라시옹/ 이현채

검지 정숙자 2020. 2. 11. 01:45



    시뮬라시옹


    이현채



  로자, 이 고약한 늙은이한테 지도에도 없는

  룩셈부르크를 샀어요. 바로크적이고도

  종말론적인 이 도시에서 장 보드리야르는

  제국주의자들처럼 파이프를 입에 물고

  말장화를 신고 있지요. 로자,

  시뮬라시옹, 시뮬라시옹… 하면서

  룩셈부르크로 가요. 새가 되고 싶어 하는

  물고기, 섬 아닌 섬으로 가기 위해

  룩셈부르크로 가요. 당신과 나는 거짓말을 튀겨

  별과자를 만들고, 알바트로스는 별과자를 먹느라

  주위를 빙빙 돌지요. 뮬란 애완 카페를 지나

  다크 사격장에서 당신은 탕! 탕! 탕!

  나를 향해 총을 쏘지요. 나는 팬시인형처럼

  바닥에 쓰러져요. 초상화를 그리는

  이름 없는 화가가 우리의 모습을 크로키해요.

  시뮬라시옹, 시뮬라시옹… 로자, 룩셈부르크의

  파란 잔디가 떠올라요. 나는 전단지처럼

  오필리아가 되어 물 위에 떠가요. 여기는

  룩셈부르크예요. 나의 침묵 안에 햄릿인

  당신이 누워 있어요. 바다가 오로라 빛으로 흔들리면

  당신은 "오! 로자" 하며 깨어나지요. 오, 시뮬라시옹,

  시뮬라시옹…. 나의 로자, 나의 룩셈부르크.

    -전문-



  해설> 한 문장: 이 시에서 화자가 명명하는 대상으로서만 존재한다. 로자가 누군지 어떤 사람 혹은 대상인지 전혀 기술되지 않는다. 다만 화자인 '나'는 로자에게 끊임없이 중얼거리고, 자신의 행적을 회상하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말들의 행려行旅를 그에게 쏟아낸다. '나'는 로자를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로자'를 계속 염두에 두고 있지만, 로자는 화자의 입술과 시선 속에서만 존재한다. 로자의 시선과 감정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의 존재는 '나'와 상관없다는 것. '나'는 단지 말하고, 로자는 오로지 들을 뿐이다. 이 같은 화자의 일방적인 행위는 일종의 고해성사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과는 차원이 전혀 다르다. 고해성사는 '용서'와 같은 '화답'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행려의 최초는 장 보드리야르라는 '고약한 늙은이한데' '룩셈부르크'를 샀다는 고백이다. 룩셈부르크는 서유럽에 위치한 실제 도시를 지칭하고, 비슷한 과정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라는 역사상의 인물과도 통용되기 때문에 일종의 '재현'에 가까울지 모른다. 하지만 화자인 '나'는 룩셈부르크의 "바로크적이고도/ 종말론적인"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그 도시를 '지도에도 없다'고 단정한다. 특히 '룩셈부르크'를 팔았다는 사람이 "제국주의자들처럼 파이프를 입에 물고/ 말장화를 신고 있"는 장 보드리야르다. 실재하는 도시를 완전히 가상의 이미지로 만들어버리는 이 장치를 통해 화자는 두 가지 효과를 노린다. 하나는 시에 등장하는 인물과 장소, 사건 등의 좌표를 현실에서 밀어내 허구와 실재의 경계에 위치시키고 다른 하나는 로자를 암흑지점으로 밀어내 시의 모든 의미-작용을 빨아들이는 일종의 블랙홀로 만들어버린다. 바로 여기서 '시뮬라시옹'이라는 유음의 덩어리는 작품 전체의 모호한 목소리를 입축하는 표징으로 작용한다.(p. 시-10/ 론-120) (박성현/ 시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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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시뮬라시옹』에서/ 2020. 1. 23. <한국문연> 펴냄

  * 이현채李賢砦/ 1967년 충남 당진 출생, 2008년 『창작 21』로 등단, 시집 『투란도트의 수수께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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