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는 동안
장순금
한 사람이 몸속을 지나가는 동안
몸 밖은 백 년이 흘렀어
시작은 책 속에 끝을 숨기고 문장으로 나를 눌러 놓았어
심야를 달리는 트럭의 깜깜 속도 속에 우리를 숨겼어
생략된 세상에서
도벽처럼 가지에 앉아 떠는 동안
바람 사이로 피로 물든 잎들을 낳았어
한 알도 부화되지 못한 잎들은 스스로 숨을 끊어
죽은 기억 속으로 들어갔어
우리는 아무도 새가 되지 못했어
기억이 죽음 같은 고요에 발이 빠져 비릿한 향내를 봄의 무덤에 뿌리고
책 속에 숨은 무수한 벽이 서로 눈물을 닦아주며 죽은 잎들을 펄럭이고 있었어
나는
천천히 물처럼 흘러내리고
한 사람이 지나가는 동안
몸 밖은 보이지 않았어
-전문-
해설> 한 문장: 인간은 자신이 관통하는 시간이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것이라고 믿지만 그것이 얼마나 커다란 착각에 해당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사실상 우주적 시간은 존재의 찰나적 시간성과 무관한 채 무한히 순환하는 영겁의 그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보편적인 우주의 시간성에 인간은 얼마나 편승하고 편입되어 있는가. "우리는 아무도 새가 되지 못했다"고 하듯 시인의 통찰에 따르면 인간의 시간성은 우주의 그것과 철저히 단절되어 있다./ 인간이 살아내야 하는 시간성은 기껏해야 "심야를 달리는 트럭의 깜깜 속도"에 불과하다. 시인의 표현처럼 인간은 맹목의 시간성에 휘감긴 채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겠는가. 이러한 시간성에 갇혀 있는 인간이란 우주의 영원성에 비추어 "생략된" 존재에 다름 아니다. 영겁의 우주는 인간의 현존을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생략된 세상"으로 내몰기 마련이다. 이 속에서 인간은 "도벽처럼 가지에 앉아 떨"며 "바람 사이로 피로 물든 잎들을 낳을 뿐이다. "잎들은" "한 알도 부화되지 못하"고 "스스로 숨을 끊"곤한다./ 시인이 묘파하는 인간의 실상은 결코 낙관적이지 않다. 영겁의 우주로부터 떨어져 나온 인간은 죽음의 "비릿한" 기억을 벗어나지 못하고 발버둥치면서 헤맬 따름이다. "죽음 같은 고요"는 발목을 끌어 채고는 그를 인간의 시간성으로부터 헤어 나오지 못하도록 몰아간다. "한 사람이 지나가는 동안 몸 밖은 보이지 않았어"는 시야를 가리는 인간의 맹목의 시간성을 의미하는 한편 존재의 안과 밖 사이의 현기증 나는 시간성의 격차를 암시한다. 인간의 비극적 시간성은 인간이 영겁의 우주 한복판에서 존재의 근거를 상실한 미아가 되게 하기에 충분하다. 이는 인간이 지금 여기에 이처럼 명백히 있으되 없음과 다르지 않는 것이며 존재하되 흔적일 뿐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같이 버젓하게 살아 숨 쉬고 있지만 이것이야말로 실상의 인간에 해당하는 것이다.(p. 시 56/ 론 113-115) (김윤정/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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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얼마나 많은 물이 순정한 시간을 살까』에서/ 2020. 1. 23. <시산맥사> 펴냄
* 장순금/ 부산 출생, 1985년 『심상』으로 등단, 시집 『햇빛 비타민』『골방은 하늘과 가깝다』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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