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과 노는 날들
홍우식
많은 날들을 침묵과 놀다
나는 한 권의 책이 되었다
행간과 행간이 넓은, 시집 같은
이 책은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지워진 칠판 같다
글자가 지워져
검은 칠판 같은 이 책을 읽고 있으면
내 안은 텅 빈 허공이 된다
이 책을 읽기 위해
나는 구름 속을 드나드는 새가 되기도 하고
천천히 흘러가는 강물이 되기도 한다
나는
많은 날들을 침묵과 놀다
한 페이지씩 책이 되었다
-전문-
해설> 한 문장: "많은 날들을 침묵과 놀다"가 자신이 "한 권의 책"이 되는 서정적 동일화는, 단순히 존재양식에 대한 놀이와 유희가 아니라 자기 성찰로서의 반성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성찰은 성찰되는 의식과 성찰하는 의식의 외적 대립에서 생겨나는데, 성찰의식은 성찰되는 의식을 자신과 동일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이 시에서 성찰하는 의식은 시인 자신이며, 성찰되는 의식은 "한 권의 책"인 것으로써 "행간과 행간이 넓은, 시집 같은/ 이 책"이 바로 시인이다. 이로써 그는 한 권의 책을 펼치듯이 자신을 펼치게 되는바,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지워진 칠판같"이 "글자가 지워져"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내 안은 텅 빈 허공이 된다"는 것으로써 아무것도 아닌 무상의 자기-존재를 들여다보며 자기 성찰이 되는 것이다. 이렇듯 시인의 방에서는 자기 성찰은 자기를 아는 것이며 자기라는 "이 책을 읽기 위해/ 나는 구름 속을 드나드는 새가 되기도 하고/ 천천히 흘러가는 강물이 되기도 한다" '새'는 자유로움의 상징이며, '강물'은 순환의 표상으로서 동일적 시선에서 시인의 침묵은 자유와 순환에 이르게 된다.(p. 시 56/ 론 94-95) (권성훈/ 시인, 경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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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고독의 다른 말』에서/ 2020. 1. 31. <서정시학> 펴냄
* 홍우식/ 충북 제천 출생, 2011년『서정시학』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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