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예리성(曳履聲)/ 문신

검지 정숙자 2020. 2. 2. 02:39



    예리성曳履聲


    문신



  그해 가을

  내가 어느 섬 작은 처마 밑에 세 들어 살 때,


  선착장에서 가장 먼 집

  섬에서도 가장 높은 집에 얹혀 살 때,


  골목과 골목이 분기하다가 딱, 매듭을 짓던 집

  기세 좋던 골목이 슬그머니 꼬리를 사리던 집에 빌붙어 살 때,


  그 가을 내내

  하룻밤에도 열두 번씩이나

  그 길다는 골목을

  오르내리던


  예리성


  그해 겨울에도

  눈 폭풍처럼 그 집 작은 창문을 흔들어대던,


  내가 어깨를 옹송그리며 골목을 걸어갈 때에는

  돌담 그늘 같은 곳으로 숨어버리던,


  이틀이고 사흘이고

  두꺼운 이불을 둘러쓴 채

  내게

  19세기 러시아 소설을 읽게 만들었던,


  섬 뒤편 대숲에서

  댓잎으로

  허벅지 안쪽 살을

  스윽스윽

  베듯

  혼자 아프게 귀 기울여야 했던


  예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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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토피아』 2019-겨울호 <소시집> 에서

  * 문신/ 2000년《세계일보》신춘문예로 시 부문 & 2015년《조선일보》신춘문예로 동시 부문 & 2016년《동아일보》신춘문예로 문학평론 부문 등단, 시집『물가죽 북』『곁을 주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