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리성曳履聲
문신
그해 가을
내가 어느 섬 작은 처마 밑에 세 들어 살 때,
선착장에서 가장 먼 집
섬에서도 가장 높은 집에 얹혀 살 때,
골목과 골목이 분기하다가 딱, 매듭을 짓던 집
기세 좋던 골목이 슬그머니 꼬리를 사리던 집에 빌붙어 살 때,
그 가을 내내
하룻밤에도 열두 번씩이나
그 길다는 골목을
오르내리던
예리성
그해 겨울에도
눈 폭풍처럼 그 집 작은 창문을 흔들어대던,
내가 어깨를 옹송그리며 골목을 걸어갈 때에는
돌담 그늘 같은 곳으로 숨어버리던,
이틀이고 사흘이고
두꺼운 이불을 둘러쓴 채
내게
19세기 러시아 소설을 읽게 만들었던,
섬 뒤편 대숲에서
댓잎으로
허벅지 안쪽 살을
스윽스윽
베듯
혼자 아프게 귀 기울여야 했던
예리성
*『리토피아』 2019-겨울호 <소시집> 에서
* 문신/ 2000년《세계일보》신춘문예로 시 부문 & 2015년《조선일보》신춘문예로 동시 부문 & 2016년《동아일보》신춘문예로 문학평론 부문 등단, 시집『물가죽 북』『곁을 주는 일』
'잡지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 짝만 잃어버리는 생/ 신현락 (0) | 2020.02.04 |
---|---|
중심에 관해/ 허연 (0) | 2020.02.04 |
이병국_ 떠돌이꾼과 산책자, 미아의...(발췌)/ 물에 뜨는 돌 : 고주희 (0) | 2020.02.02 |
돌담 쌓기/ 박찬선 (0) | 2020.02.01 |
보통 문장의 따뜻함/ 구현우 (0) | 2020.01.30 |